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설치 운영되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되는 기물을 제작하는 관요에 관한 문헌이 없으나, 그 당시의 고분과 사지(寺址) 등에서 출토되는 무수한 토기를 통하여 관요에서 특별히 제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토기요지(土器窯址)가 경주를 중심으로 천북면 일대에 밀집해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당시 지배층의 기물도 대부분 관요에서 제작되었으리라 본다.
고려 초기에는 주로 서해안지역에 청자요지(靑瓷窯址)가 형성되었으며, 중기부터는 강진과 부안의 관요에서 집중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했고, 말기에 이르러서는 관요의 운영과 도자기의 생산이 저조해지면서 전국 각지에 독자적인 관요와 민요(民窯)가 생겨났다.
지방의 말단 행정구역인 자기소(磁器所)에서는 주로 관수용(官需用)을 제작 수납하였고, 민수용은 민요에서 담당하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려청자 가운데 뛰어난 명품들은 주로 관요제품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 자기소가 136개소, 도기소(陶器所)가 185개소나 되었으며, 여기에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자기를 토산공물(土産貢物)로 진상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요의 사기장(沙器匠)은 380인이 기본이었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는 550인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관요의 건물은 대개 초옥으로 지어졌고, 그 비용과 작업감독은 지방관아에서 담당하였다. 관요의 사기 제조는 추위가 풀릴 때부터 추위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사옹원(司甕院)에서 파견되는 봉사(奉事)에 의해서 관리되었다.
관요의 연간 사기 제조량은 일정하지 않았으나, ≪육전조례 六典條例≫에 따르면, 1,372죽(竹)이었으며, 정규적인 진상사기(進上沙器)가 주로 왕실소용의 일반용기와 봉상시(奉常寺)의 제기 및 내의원(內醫院)의 제약용(劑藥用), 그리고 외국사신의 접대용에 필요한 사기로도 공급되었다.
≪분주원보등 分廚院報謄≫에 따르면, 당시 관요의 조직은 감관을 비롯하여 경영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과 실제 사기 제조를 하는 사기장, 그리고 사기번조를 위한 잡역으로 나누어져 철저히 분업화된 가운데 제작, 운영되었다.
15세기 후반경에는 관어용(官御用)의 사기를 위해 경기도 광주 일대에 관영 사기제조장으로서 사옹원의 분원을 설치하여 주로 백자 등을 제작하였는데, 광주분원은 1884년 민영화될 때까지 관요로서 제작활동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