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조선백자 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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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광주 번천리 백자요지 출토 백자음각가정33년명묘지
광주 번천리 백자요지 출토 백자음각가정33년명묘지
공예
유적
국가유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 분청사기 · 청화백자 등을 굽던 가마터.
이칭
이칭
광주조선백자도요지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광주 조선백자 요지(廣州 朝鮮白磁 窯址)
분류
유적건조물/산업생산/요업/도자기가마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85년 11월 07일 지정)
소재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중부면,광주읍, 초월면,도척면,실촌면, 남종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 분청사기 · 청화백자 등을 굽던 가마터.
개설

198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광주 일대에는 조선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성립된 분원 요지가 많이 남아 있다. 광주 일대의 분원요지의 분포를 보면 퇴촌면, 초월읍, 곤지암읍, 도척면, 남종면, 남한산성면, 송정동, 탄벌동 등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총 220여 개의 요지 중에서 발굴조사된 것은, 1965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퇴적층 일부가 확인된 퇴촌면 도마리요지, 1985년과 1986년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 가마구조와 작업장이 확인된 남한산성면 번천리 제5호요지, 그리고 초월읍 선동리 제3호요지가 있다.

각 면에 따른 분포는 다음과 같다. 퇴촌면은 총 58개소로, 우산리 16개소, 관음리 21개소, 도마리 7개소, 도수리 9개소, 정지리 4개소, 원당리 1개소 등이다. 초월읍은 총 46개소로, 무갑리 16개소, 학동리 11개소, 대쌍령리 4개소, 지월리 6개소, 쌍동리 1개소, 산리리 1개소, 선동리 7개소이며, 곤지암읍은 신대리 18개소, 유사리 9개소, 곤지암리 6개소, 열미리 6개소, 오향리 7개소, 건업리 2개소, 장심리 1개소 등 모두 49개소이다. 도척면은 총 13개소로 궁평리 6개소, 상림리 7개소 등이며, 남종면은 삼성리 3개소, 금사리 7개소, 분원리 2개소, 귀여리 6개소 등 총 18개소이다. 남한산성면은 오전리 7개소, 번천리 15개소 등 총 22개소이며, 송정동 9개소, 탄벌동 7개소 등이다.

이상의 분포에서 볼 때 광주시 중 퇴촌면, 초월읍, 곤지암읍 등에 요지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변천

광주는 무갑리·앵자봉 등 수목이 무성한 산지가 있어 번목(燔木)의 조달사정이 좋고 백토(白土)가 산출되는 곳이었다. 또 제품의 주공급지인 서울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한강을 이용한 제품의 운반에도 편리하였기 때문에 사옹원의 사기제작소 분원이 광주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사기 제작에서 원료인 백토와 함께 필수불가결한 재료는 연료로 사용되는 번목이었다. 분원은 설치 당초부터 번목의 조달을 위해 일정한 산지를 공급받았느데, 그것이 이른바 분원시장절수처(分院柴場折受處)이다. 분원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분원 시장은 광주를 중심으로 지급되었다. 광주의 분원시장은 대개 퇴촌면, 실촌면, 초월면, 도척면, 경안면, 오포면 등 6개면에 걸쳐 있었으며, 이들 6개면은 계속 분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분원도 대개는 이 지역 안에서 이동되었다. 분원은 약 10년에 한 번씩 시장 안의 수목이 무성한 곳을 따라 이전하였고, 한번 분원이 설치되어 번목을 채취한 곳은 수목이 다시 무성해질 때까지 비워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그곳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목을 채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면 일정한 장소에 분원이 고정되었는데, 18세기 초 무렵 분원은 우천강변의 금사리에 약 30여 년간 정착되었다가 1752년(영조 28)에 분원리로 이전되었다.

내용

사옹원의 사기제작소가 광주에 설치된 것은 15세기 후반 무렵이며, 남한산성면 번천리 일대에서 정교한 상품(上品)의 백자, 청화백자편이 수집되었다. 번천리요지와 같은 성격을 띤 곳으로는 도마리 1호요지, 무갑리 2호요지, 우산리 9호요지, 오전리 1호요지, 신대리 17호요지, 학동리 5호요지 등이 있다. 이들 요지에서는 공통적으로 초기의 백자, 청화백자, 청자의 사발, 대접, 전접시, 호, 병, 합, 잔 등의 다양한 기형이 출토되었는데, 유약과 태토가 정선되어 광주 일대에서 가장 우수한 백자를 만들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백자는 가는 모래받침에 직립된 수직굽을 지니며, 대접이나 사발의 경우 구연(口緣)이 밖으로 굽었고 바닥에 넓은 원심(圓心)을 지니고 있으며, 유색은 옅은 설백색으로 빙렬(氷裂)이 있다. 기형은 풍부한 양감을 지니고 대접·사발의 굽안 바닥에는 대칼로 ‘천(天)’·‘지(地)’·‘현(玄)’·‘황(黃)’명이 오목새김되어 있다.

이들 요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는 3∼6개소의 비짐돌받침의 대마디굽백자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중심요의 기물은 왕을 위한 것이고, 주변요의 기물은 관청 및 사대부들이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명문 있는 그릇이 출토되는 요지는 연대가 확실한 백자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고 믿어진다.

이들 초기 요지의 뒤를 이어 16세기 중엽부터 말에 이르기까지 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요지로는 관음리 4호·5호·10호·11호·21호요지와 대쌍령리 1호, 도수리 4호, 정지리 3호요지가 있다. 여기에서는 ‘별(別)’·‘좌(左)’·‘우(右)’명 굽다리 조각과 매우 우수한 설백·청백의 다양한 기형의 백자가 출토되었다. 구연이 밖으로 굽었고 바닥에 넓은 원심이 놓여 있다. 청화백자, 철회백자, 청자 조각이 함께 발견되었다. 가는모래받침에 수직굽이 있는 백자 요지 주변에는 비짐돌이 작아진 대마디굽백자요지가 3, 4개소 널려 있으며, 이러한 대마디굽 백자의 제작시기는 15, 16세기 말까지이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간지좌(干支左)’·‘간지우(干支右)’·‘간지별(干支別)’이 새겨진 도편이 출토되어 요의 제작시기와 장소, 요의 변천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간지가 있는 백자와 함께 청화백자, 철회백자, 청자가 출토되는데, 모두 가는 모래받침의 직립된 수직굽으로 구연은 밖으로 적게 굽었고 바닥에 원심이 작아지며 유색은 회백·청백을 띤다.

특히 선동리요지에서는 10년에 걸친 간지가 발견되어 문헌기록에 명기된 바와 같이 분원이 10년에 한 번씩 수목이 무성한 곳을 따라 이동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요지의 주변에서는 굵은 모래받침의 오목굽백자가 3∼6개소씩 널려 있으며, 이러한 오목굽회 백자는 굽바닥이 오목하게 패어 있고 굵은 모래받침으로 구웠다. 태토는 잡물이 많이 섞여 있으며, 유색은 회색·회백색을 띤다.

오목굽이 출토되는 요지의 출현 시기는 간지가 출토되는 중심요와 동일하여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이다. 탄벌리, 학동리, 상림리, 선동리, 유사리, 신대리, 지월리 일대가 이 시기 요지이며, 이곳에서는 특히 철회백자가 많이 제작되었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요지로는 18세기 초의 오향리요지와, 1721년경부터 1752년 분원으로 옮겨가기까지의 금사리요지가 있다. 이 두 요지에서 제작된 백자는 가는 모래받침의 수직굽으로 약간 푸른색이 감도는 설백의 유색에 빙렬이 많이 나 있다. 특히 금사리요지에서는 각이 있는 병, 제기편과 우수한 청화백자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분원리요와 함께 매우 중요한 곳이다.

금사리요의 뒤를 이어 분원 요지의 최후의 종착지로는 한강을 앞에 둔 분원리요지가 있다. 이곳은 1752년부터 1883년 분원이 민영화되기까지 제작, 운영되었던 중요한 곳으로, 오늘날 남겨진 대부분의 백자와 청화백자는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대체로 초기에는 금사리요와 비슷하며 유색은 푸르스름한 백자로서, 문방구, 제기, 병, 호 등이 많이 제작되었다. 분원리 요지는 조선시대 후기의 가장 큰 규모의 요지로서 도자사(陶磁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그 자리에 학교를 지으면서 크게 파괴되어 이제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한국백자도요지』(정양모·김득풍·윤용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사옹원과 분원」(정양모, 『한국의 도자기』, 문예출판사, 1991)
「조선시대분원의 성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광주일대도요지를 중심으로」(윤용이, 『고고미술』149·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분원연구」(강만길, 『아세아연구』8-4,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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