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정치는 1904년 8월에 체결된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에 따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재정, 외교 등을 간섭한 정치이다. 일본은 시정 개선을 명분으로 고문협약을 강요하고,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와 외교 고문 스티븐스(D.W.Stevens)를 파견하였다. 그 밖에 궁내부 고문, 경무 고문, 법부 고문, 군부 고문, 학정(學政) 참여관, 광산 고문을 비롯하여 보좌관, 교관 등의 명목으로 수많은 일본인 고문들을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내정 전반을 장악하였다.
1904년 8월 22일 체결된 '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은 재정 고문과 외교 고문을 파견함으로써 고문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로 군사적인 강점 상태에서 시정 개선을 명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을 시작한 것이다.
먼저 재정 고문으로 1904년 10월 14일,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主稅局長) 출신의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대한제국 정부와 용빙 계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외교 고문으로는 같은 해 12월 27일에 일본이 추천한 미국인 스티븐스(D. W. Stevens)가 초빙되었다.
메가타는 재정에 관한 일체 사항을 심의할 권리가 있고, 의정부 회의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재정에 관한 의견을 황제에게 직접 상주할 수 있고, 대한제국 정부가 해고하려고 해도 일본이 동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단순한 고문이 아니라 대한제국 정부의 재무 감독관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메가타는 재정 정리를 명분으로 황실 재산 정리 및 관제 개혁, 군비 축소 등 대한제국 통치 전반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반면 외교 고문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가 추천을 취소하면 속히 해약해야만 하였고, 또 중요 안건은 모두 주한일본공사 및 일본 정부와 협의하게 되어 있었다.
스티븐스는 대한제국의 해외 공관을 철수하는 방법으로 을사늑약 체결 전부터 이미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외교권 행사를 제한하였다. 그런데 고문용빙 조약에 의거한 재정 고문, 외교 고문 외에도 일본은 궁내부 고문, 경무 고문, 군부 고문, 법부 고문, 학정(學政) 참여관, 광산 고문 등 수많은 일본인 고문, 보좌관, 교관 등을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내정 전반을 장악하여 갔다.
특히 주한일본공사를 재임하였고 농상공부 고문으로 있던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는 재정 고문, 외교 고문이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도 전인 1904년 9월 10일, 궁내부 고문에 임명되어 대한제국기에 황제권의 실현기구로 대폭 확대된 궁내부 제도를 축소하는 데 착수하였다. 치안 경찰권의 장악을 위해 1905년 2월 3일에는 일본 경시청 제1부장 출신의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경무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 밖에 일본 농상무성 지질조사 소장 출신의 고치베 다다우케[巨智部忠承]가 광산 고문에, 대한제국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가 학정(學政) 참여관으로 용빙되었다. 한국 주차군(駐箚軍) 사령부 국제법 촉탁으로 근무 중이던 노자와 다케노스케[野澤武之助]는 법부 고문으로 초빙되었고, 군부 고문에는 주한일본공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던 육군중좌 노즈 시노타케[野津鎭武]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제1차 한일협약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대한제국 정부와 용빙 계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재정 고문이나 외교 고문보다는 그 지위가 낮았다. 그러나 이들 일본인 고문들은 종래 대한제국에 고용되어 단순히 기술적 자문을 담당하였던 서양인 고문들과는 그 위상이 달랐다.
일본 정부가 직접 추천하여 파견하고 주한일본공사관의 지휘를 받으면서 고문정치체제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갑오개혁 때에도 40여 명의 고문관을 파견한 적이 있으나, 이때의 고문관은 주로 근대식 법령 제정 등을 자문한 데 그친 반면, 1904년 이후에 파견한 일본인 고문들은 직접 대한제국 행정 각 분야에서 집행까지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재정 고문과 경무 고문은 그 소속 관리들까지 집단으로 용빙하여 재정 고문부, 경무 고문부라는 기구를 구성하고 독립적인 집행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즉 일제는 통감부 설치 이전에 이미 고문정치를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상당 부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