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 혹은 제1차 한일협약이라고도 부른다. 그 해 2월 23일에 조인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제1조에 의거, 대한제국의 내정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체결되었다. 이 협정 체결은 곧 한국의 외교권·재정권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한 의도는 한국에서의 제반 권리와 경제적 이익의 독점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대한시설세목(對韓施設細目) 등과 같은 세밀한 대한경영방안을 작성해, 국방·외교·재정·교통·통신·척식 등의 분야에 걸쳐 보호국화를 위한 기반 구축을 획책하여 갔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내정을 간섭할 수 있는 장치로서 이 협정서의 체결을 강행하였다.
협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협정이 규정한 내용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사람들을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으로 용빙하고, 재무나 외교에 관한 사항을 이들과 상의해서 처리하며, 한국 정부가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중요한 외교 안건을 다루어야 할 경우, 일본 정부와 사전에 합의해 처리해야만 하였다.
그 결과 일제는 이 협정서에 의거, 일본 대장성(大藏省)의 주세국장(主稅局長)이었던 메가타(目賀田種太郎)를 재정고문으로 임명, 한국 정부의 재정을 정리감사(整理監査)하고 재정상의 제반 설비에 관한 심의·기안의 책임을 담당하게 하였다. 동시에 한국 정부는 재정에 대한 일체의 사무를 메가다의 동의를 구해 실행해야 했으며, 메가다는 재정에 관하여 그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 외무성촉탁 친일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 W.)를 외교고문으로 임명, 한국 외교를 감독, 정리하게 하였다. 이 조처에 의해 한국의 외교는 실질적으로 일제의 완전한 감독하에 들어가, 한국 정부의 독자적인 외교활동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문들의 권한을 크게 부여한 일제는, 한국 정부가 이를 변경하지 못하도록 용빙계약까지 부쳐 규정해 놓았다. 따라서 한국의 주권은 「한일의정서」보다 더욱 무거운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밖에도 협정 사항에 없는 고문관을 한국 정부가 자진 초청한다는 형식을 빌려 각 부처에 임명하였다.
군부(軍部)의 고문에 주한일본공사관무관(駐韓日本公使館武官) 노즈(野津鎭武), 내부(內部)의 경무(警務) 고문에 일본 경시청의 경시 마루야마(丸山重俊), 궁내부(宮內部)의 고문으로는 한국에서 영사를 지낸 경력을 가진 가토(加藤增雄), 학부(學部)의 학정참여관에는 시데하라(幣原坦) 등이 각각 취임하였다.
고문들의 부임에 따라 한국의 재정·외교·군사·경찰·문교와 궁정의 중요한 제반 분야가 일본인에 의해 장악·감시되었다.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의 시작이었으며, 이 고문정치 체제를 통해 일제는 한국의 식민지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추진시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