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만(稚萬), 호는 강암(剛庵). 사과 이승조(李承祖)의 아들이며, 을사조약 때 분사(憤死)한 조병세(趙秉世)의 사위이다.
1875년(고종 1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설서 · 검열 · 정언 · 응교를 거쳐 사간 · 승지를 지낸 뒤 1890년 이조참의에 올랐다.
1892년 이조참판에 이어 대사성에 보임되고, 1894년 내무협판에 전임되었다가 송도유수로 나갔다. 이듬해 춘천부사로 전임되었다가 1897년 학부협판의 내직으로 전보되고, 다음해 참찬으로 승임되었다.
1900년 찬정(贊政)을 거쳐 1902년 비서경으로 보임되었다가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전라북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1904년과 1909년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점된 뒤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3·1운동 때 경학원부제학 재직시 대제학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조선독립청원서사건으로 작위를 박탈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