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총파업 ()

사회구조
사건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한국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원산총파업은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이다. 영국인이 경영하던 문평제유공장의 일본인 간부들의 민족 멸시·차별에 항의한 파업이 발단이 되었다. 경찰의 비호 속에 회사의 탄압이 거세지자 원산노동연합회가 전면에 나서면서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어용단체 함남노동회를 만들어 원산노동연합회 말살을 시도했고 경찰은 주요간부 검속으로 이를 도왔다. 전국 각지의 후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3개월 동안 강인하게 투쟁했으나 노동자측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목차
정의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한국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
내용

원산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이었다. 당시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문평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가 있었는데, 그 지배인과 주요 간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들 일본인은 평소 조선인 노동자들을 민족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타마(兒玉)라는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에게 욕설과 구타를 일삼았는데, 1928년 9월 초 또 다시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120여 명의 노동자들이 고타마의 파면과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일으켰다.

20여일이 지난 후 9월 28일 회사측은 폭행을 가한 감독을 축출할 것, 파업단에서 희생자를 내지 말 것, 파업 중 임금은 회사 측이 4할 지급할 것, 최저임금 · 해고수당 · 위자료 문제에 대해서는 오사카[大阪], 고베[神戶] 등 다른 공장의 예를 참작하여 3개월 이내에 다시 협의에 응한다는 등의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파업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후에도 회사측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고, 노조와 원산노동연합회 등 일체의 노동자 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회사측은 경찰에게 파업의 주요 인물을 검거하게 하는 한편, 일본인 노동자를 모집하여 작업을 하도록 했지만 그들도 작업을 거부하였다.

1929년 1월 13일 문평제유노동조합의 보고를 받은 원산노동연합회는 긴급집행위원회를 열어 최저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 실시, 감독과 파면, 대우 개선, 단체계약권 확립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였다. 또한 원산노동연합회는 문평제유 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전 원산 부두노동자들에게 문평제유의 화물을 일체 취급하지 말도록 하였고,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전 조합원은 파업이 해결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고 매일 1인당 5전씩 걷어 파업자금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1월 14일 문평제유노동조합과 문평운송노동조합이 파업을 단행하고, 특히 문평제유에서는 자동차 운전수 · 취사부 · 수위까지도 파업에 가담하여 회사 운영이 완전히 정지상태에 빠졌다. 이와는 별도로 1929년 1월 3일 원산부두노동조합에서는 대성상회(大盛商會) 외 9개 운수회사에 대해서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1월 10일에는 국제통운과 국제운수에 대해서도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이런 와중에 원산노동연합회의 요청으로 문평제유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문평제유 화물의 하역작업을 거부하였다.

원산의 운수회사들과 일본인 자본가들의 집단인 원산상업회의소에서는 원산노동연합회가 언제나 조직력을 동원하여 임금인상 등 각종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서 투쟁하였으므로 기회만 있으면 이를 파괴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해 1월 17일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토의하였다. 그들은 원산노동연합회를 타도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그 방법을 원산상업회의소에 일임하였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인천이나 중국의 안동에서 한국인 및 중국인 노동자들을 모집해 오도록 하였다. 또한 원산유조업조합으로 하여금 그 해 1월 21일부로 원산노동연합회 소속 노동자를 일체 고용하지 않겠다는 통고문을 내도록 하였다. 그 결과 29일, 운수회사는 파업에 동조하는 노동자들에게 해고통지를 내고 문평제유에서도 파업에 가담해 결근하는 노동자는 퇴직으로 간주한다고 고시하였다.

이런 일련의 조치에 맞서 원산노동연합회는 1월 22일 집행위원회를 열고 원산상업회의소에 대항하기 위해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그 날로 원산두량노동조합 · 해륙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날 결복노동조합(結卜勞動組合)과 운반노동조합이, 24일에는 원산중사조합(元山仲仕組合)과 원산제면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7일에는 양복직공조합이, 28일에는 우차부조합(牛車夫組合)과 인쇄직공조합이, 2월 1일에는 양화직공조합이 파업에 가담함으로써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24개 노조의 노동자 2,200여 명이 총파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우선 원산노동연합회 간부 7, 8명을 구속하고 400여 명의 일본인 재향군인과 청년회 · 소방대원을 동원하여 시가지를 엄중히 경계하였다. 또한 함흥보병대에서 약 300명의 군인을 차출하여 시가행진을 하게 함으로써 원산 일대를 계엄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인천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를 데려다가 세관창고에 수용하고 부두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원산상업회의소에 대하여 사건 해결을 위한 공동연설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하는 한편, 시민들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인쇄 · 제면 · 차량 · 양복 · 양화 등의 노동조합에 대하여 파업중지령을 하달하는 등 성의있는 조치를 취했으나,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동연합회의 굴복을 고집하여 노동자들의 생활이 곤궁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리하여 파업은 장기화되어 1만 명이 넘는 노동자 가족들은 생활난에 빠져들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파업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하여 양식을 배급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 · 청년단체 · 농민단체 등이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으며, 일본 · 중국 · 프랑스 · 소련의 노동단체들의 격려와 후원이 있었다.

이상과 같은 노동자들의 성의있는 해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경찰은 원산노동연합회 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를 계속 검속하였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운수관계 자본가들로부터 어용노동단체 설립자금을 마련하고 폭력배를 모아서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동단체를 조직하였다. 또한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동연합회의 주의 · 강령 및 간부들을 바꾸는 조건으로 원산노동연합회를 인정하고 그 산하 노동자들을 취업시키라는 원산 부윤의 조정안조차 일축하였다. 그리고 원산노동연합회에서 탈퇴하여 함남노동회에 가입하는 자만을 고용한다는 방침을 고수하였다.

총파업은 3월 중순이 되어도 해결되지 않았고, 원산노동연합회의 파업기금이 고갈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검속된 간부들의 뒤를 이은 새 지도부는 점차 투항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고, 원산상업회의소가 계속 노동자들에게 원산노동연합회를 탈퇴하여 함남노동회에 가입하면 취업시키겠다고 유혹하자 노동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이리하여 일부 노동자들이 원산노동연합회를 탈퇴하기 시작했고, 원산노동연합회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흥분한 노동자 수십 명이 4월 1일 오후 6시 함남노동회로 몰려가서 전선을 끊고 돌을 던지며 몽둥이를 휘둘러 함남노동회의 간부와 회원들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노동자들은 4월 3일 새벽 2시 함남노동회 세포 단체의 책임자인 김경문(金敬文)의 집을 습격하여 김경문 등 일행을 구타하여 중상을 입히고 함남노동회의 작업장을 습격하였다. 일본 경찰은 즉시 수백 명의 경관을 출동시켜 원산노동연합회 소속 노동자 40여 명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이 일로 말미암아 많은 노동자가 체포 · 구금되었고, 마침내 파업은 폭력화되었다.

이에 원산경찰서장은 원산상업회의소에 종용하여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자들이 함남노동회를 통하지 않고도 고용될 수 있도록 수락하게 하였다. 한편 투쟁 의욕을 상실한 원산노동연합회의 소수 간부들은 그 해 4월 6일 전체 회원들의 무조건 자유취업을 결의하였고, 4월 8일에는 각 세포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대의원회에도 이 사실을 알려 4개월에 걸친 원산총파업은 노동자측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원산노동연합회의 존재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시도한 원산상업회의소의 당초 목적은 그대로 관철되지 못했다. 파업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원산총파업이 한국노동운동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며 그 뒤에도 그와 같이 장기간에 걸친 강인하고 조직적 파업은 없었다.

의의와 평가

원산총파업은 일제시대 최대 규모의 파업으로 1930년대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총파업은 합법적인 투쟁이 일제의 탄압 속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전 민족에게 보여줌으로써 비합법적인 정치 투쟁의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전국적 조직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하여 산업별 노조 건설의 노력을 추동하였다. 그리고 총파업에 대한 전국 각지로부터의 열렬한 성원은 원산총파업이 단순히 노동운동사에서뿐 아니라,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참고문헌

『한국 근대 노동사와 노동운동』(김경일, 문학과지성사, 2004)
『일제하 노동운동사』(김경일, 창작과비평사, 1992)
『한국노동운동사』Ⅰ(김윤환, 청사, 1981)
『한국노동조합운동사』(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한국노동조합운동사』(조창화, 한국노동문제연구원, 1978)
「사건과 인물로 보는 역사 이야기 1: 원산총파업 일제하 노동운동의 꽃」(노광표, 『노동사회』4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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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류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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