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저암(猪巖), 필명은 야뢰(夜雷)·창해거사(滄海居士)·백두산인(白頭山人)이다. 도호(道號)는 긍암(亘菴), 창씨명은 히로야마 가즈구사(白山一熊)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한 뒤 1904년 천도교의 민회운동단체인 진보회 평의원을 맡았다. 1905년경 평양일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910년 천도교월보사 사원으로 근무하였고, 1919년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맡았다. 1920년 천도교청년회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개벽(開闢)』을 창간한 뒤 1926년 폐간될 때까지 주간·편집인을 역임하였다.
1922년 1월 천도교중앙종리원에서 편집과 주임을 맡은 뒤 편집 촉탁, 종리사, 지도관정, 상주현법사, 상주선도사를 역임하는 등 천도교단 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22년 천도교청년회 지육부장과 이 해 창간된 『부인』지 편집인을 맡았다. 1923년 천도교청년회를 확대 개편한 천도교청년당 상무위원이 된 후 1927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조선농민』지 편집 겸 발행인이 되었고, 1932년까지 조선농민사 이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1945년까지 『신인간』지의 발행인 및 편집인을 맡았다. 1928년 천도교강사양성강습회 강의를 담당하였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이 되었다.
1937년 ‘조선신궁 국위선양 기원제 준비’ 발기인을 맡았고, 지방순회강연대에서 활동하였다. 1938년 종교단체연합회가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내선일체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이사,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총력천도교연맹 평의원을 맡으면서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에 협력하였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이 되어 ‘미·영 타도 대연설회’ 강사로 활동하였고, 임전대책협력회의 채권가두판매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5년 천도교총본부 전국대회준비위원회 교약기초위원, 개벽사 이사, 순국의열사봉건회의 혁명역사 및 선열전기편찬위원, 임시정부영구환국전국환영회 서무부 위원을 맡았다. 1946년 이준열사추념대회준비회 발기인으로 참가하였고, 1946년 군정청 내 유지 중 관리들로 조직된 행정건국협조회의 행정건국대강연회에서 연사를 맡았으며, 1947년 천도교총본부 고문으로 선정되었다.
천도교 이북교회의 책임을 맡아 북한에서 거주하던 중 한국전쟁 때 평안남도 양덕 천도교수도원에서 북한군에게 납치되었고, 1950년 12월을 전후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