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변제절목 ()

경산 정원용 의대 중 전복
경산 정원용 의대 중 전복
의생활
제도
1884년(고종 21), 사복(私服)의 개정을 규정한 절목(節目).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884년(고종 21) 5월 24일
공포 시기
1884년(고종 21) 6월 3일
시행 시기
1884년(고종 21) 7월 10일
폐지 시기
1884년(고종 21) 10월
시행처
조선왕조
주관 부서
예조(禮曹)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사복변제절목」은 1884년(고종 21) 사복(私服)의 개정을 규정한 절목(節目)이다. 사복은 귀천을 막론하고 착수의를 입고, 도포· 직령·창의·중의 등의 옷은 폐지한다. 또 관원의 사복은 착수의에 전복(戰服), 답호(搭護)를 덧입은 후 사대를 매게 하였다. 이 외, 관청의 서리들이 단령을 입는 것을 폐지하고, 유생은 왕을 알현할 때 입는 옷, 재복(齋服), 유건(儒巾), 화(靴)는 이전과 같지만 나머지 상황에서는 반령착수(盤領窄袖)에 실띠[絲帶]를 매게 하였다. 생원, 진사, 유학의 사복 소매를 좁게 하였다.

정의
1884년(고종 21), 사복(私服)의 개정을 규정한 절목(節目).
제정 목적

조선 말기에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사회 분위기가 점점 실용성에 가치를 두기 시작하면서 고종(高宗)은 크고 넓은 옷을 개혁하여 간소화하고자 하였다. 고종이 추진했던 복식 간소화는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갑신의제개혁은 관복(官服)과 사복(私服)을 색, 옷의 종류, 형태 등에 있어 종합적으로 간소화하고자 했다. 비록 신하들의 강한 반대와 더불어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까지 더해지면서 실행으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나, 복식의 불편함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시도하였다. 갑신년의 개혁은 1884년(고종 21) 윤 5월 24일 흑단령(黑團領) 착용에 관한 고종의 전교(傳敎)로 시작되어, 6월 3일에 예조(禮曺)에서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을 마련하여 같은 날 고종의 비준을 얻고, 7월 10일 이후 새 제도를 적용하여 광수의(廣袖衣)를 입지 못하게 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내용은 관원들이 집무복으로 입는 관복인 단령(團領), 관원 및 기타 신분이 사적으로 입는 사복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내용

박영효(朴泳孝)가 귀국하고 1883년(고종 20)부터 1884년에 걸쳐 미국에 파견된 보빙(報聘) 사절까지 귀국한 후인 1884년 윤 5월 24일 조선에서는 관복을 착수의 흑단령으로 하는 내용을 주로 하는 최초의 의제 개혁인 갑신의제개혁이 단행되었다. 갑신의제개혁을 주도한 인물들은 일본과 서양에서 새로운 복식 제도를 경험한 이들과 이들을 지원한 국왕 고종이었다. 같은 달 25일 전교(傳敎)에서는 도포(道袍), 직령(直領), 창의(氅衣), 중의(中衣) 등을 겹쳐 입고, 광수(廣袖)인 것이 불편하므로 사복을 착수의(窄袖衣), 전복(戰服), 사대(紗帶)로 간편하게 착용하도록 지시하면서 해당 관청에서 절목(節目)을 정하도록 하였다. 같은 날 전교에서는 착용하던 관복을 반령(盤領)으로 고쳐 만들지 말고 단지 착수의로만 만들어 착용하도록 하고, 홍단령(紅團領)은 검게 물들여 착용해도 무방하다고 하였고, 새 옷을 지을 때는 반드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고종의 명에 따라 사복 개혁의 구체적 내용이 준비되고, 1884년 6월 3일에 예조에서 「사복변제절목」을 마련하여 왕에게 보고하고 왕이 바로 승인하였다. 1884년 6월 3일 「사복변제절목」이 공포됨으로써 갑신의제개혁에서 시도한 관복 간소화에 관한 기본 규정은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종실록(高宗實錄)』 기사에 의하면 당시 고종의 강경한 실행 의지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반포된 후 7월 27일까지 두 달 사이에 약 24건의 반대 상소(上疏)가 올라오고, 절목을 마련해야 할 예조에서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반대 의견이 매우 강하였다. 더구나 이때 개혁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그 해 10월에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보수파 무마책의 일환으로 갑신의제개혁은 철회되었다.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은 총 12조항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사복이 착수의로 정해졌고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항상 착용이 가능하며 기존에 입었던 도포, 직령, 창의, 중의 같은 포(袍)는 모두 없앤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때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옷 중 도포는 제례(祭禮)를 위해 필요하다는 영의정 김병국(金炳國)의 건의에 의해 폐지되지 않았다.

다음은 벼슬이 있는 사람, 유생(儒生), 서민, 벼슬이 없는 사람 등이 사복을 입을 때의 차이점을 설명한 것이다. 벼슬이 있는 사람의 경우 전복을 더 입을 수 있도록 하고, 벼슬이 없는 사람은 기라능단(綺羅綾緞)과 같은 좋은 비단의 사용을 제한하였다. 사복으로 정해진 착수의에는 다른 색의 연(緣)을 달 수도 있는데 연의 폭은 포백척 1촌(寸)으로 제시하고 있다. 7번째 항목부터는 대, 갓끈, 옷고름에 대한 내용을 정한 것으로 대의 남는 부분이 1척(尺)을 넘지 못하게 하고 갓끈과 옷고름 역시 늘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11번째 항목은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은 착수의 백의(白衣)를 착용하도록 한 것으로 벼슬이 있는 사람은 담색(淡色)의 전복을 더 착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복변제절목」은 미진한 조건은 추후에 마련하도록 한다는 마지막 항목을 제외하고 11개의 항목 모두 새롭게 마련한 사복 제도와 좁은 소매옷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복식을 간소화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사복변제절목」이 공포됨으로써 갑신의제개혁에서 시도한 관복 간소화에 관한 기본 규정은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 상소가 계속 올라오고 반대 의견이 매우 강하였다. 더구나 이때 개혁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그 해 10월에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보수파 무마책의 일환으로 갑신의제개혁이 철회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복변제절목」은 우리나라 복식의 근대화에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종실록(高宗實錄)』

단행본

이창훈 외, 『한국근·현대 정치와 일본』 1(도서출판 선인, 2013)

논문

강상규, 「1884년 의제개혁에 대한 정치적 독해」(『한국근·현대 정치와 일본』 1, 도서출판 선인, 2013)
이경미, 「개항기 전통식 소례복 연구」(『복식』 64-4, 한국복식학회, 2014)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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