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건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사용하였던 쓰개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썼던 굴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상주가 착용할 때는 굴건 안에 두건을 받쳐 쓰고 그 위에 수질을 이마에 둘러 고정한다. 영친왕의 재종질(再從姪)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굴건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굴건(屈巾)은 상복(喪服)의 두건(頭巾) 위에 겹쳐 쓰는 거친 삼베로 만든 쓰개이다. 이러한 굴건은 1970년 5월 1일 낙선재(樂善齋)에서 거행된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91970)의 장례 때 이달용(李達鎔, 18831948)의 아들 이해상(19131985)이 사용하였던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굴건을 포함한 이해상 내외 상복 일습은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상복은 총 9점으로, 굴건, 건(巾), 수질(首絰), 최의(衰衣), 상(裳), 요질(腰絰), 중단(中單), 대수장군(大袖長裙), 행전(行纏) 등이다. 이해상은 고종황제의 사촌인,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 18551922)의 아들인 이달용의 3남으로, 영친왕과는 재종질(再從姪) 관계의 인물이다. 상복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굴건은 예관(禮冠)으로 양관(梁冠)과 제관(祭冠)에서 보이는 줄이 표현되어 있다. 오복이 모두 세로로 3개의 주름이 잡혀 있으며 줄의 방향이 참최(斬衰), 재최(齊衰), 대공(大功)의 경우 오른쪽으로 향하며 소공(小功), 시마(緦麻)의 경우 왼쪽으로 향하고 있다. 길이 2척(尺) 미만의 거친 베를 길이로 세 개의 주름을 잡아 너비 3촌(寸) 정도가 되도록 만들고 베 뒤쪽에 종이를 배접하여 뻣뻣하게 하고 세 솔기가 지도록 만들며, 착용할 때는 굴건 안에 두건을 받쳐 쓰고 그 위에 수질을 이마에 둘러 고정한다.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31년(1598) 6월의 기록에 “굴관(건)의 높이가 매우 높아져 거의 1척이나 되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높이는 대체로 1척 미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굴건의 형태에 관하여 관(冠)의 꼭대기를 반으로 접은 후 접은 선이 똑바로 상향하도록 썼으므로 굴건이라고도 하였는데, 다산(茶山)은 “관은 응당 둥근 모양 그대로 써야 하며 꺾어서 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최관(衰冠)의 윗부분이 접힌 꺾인 형태와 둥근 형태가 함께 통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굴건을 고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무를 다는데 삼끈을 꼬아서 만들며 최관의 아랫부분을 통과하여 머리에 두르고 남는 끈을 귀 위치에서 늘어뜨려서 영을 만들고 이를 턱 아래에서 묶어 최관을 머리에 고정시킨다.
이 굴건의 높이는 36㎝, 너비는 17㎝이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家庭儀禮準則)」 시행 이후, 상복을 간소화하고 노제(路祭)와 삼우제(三虞祭) 등을 없애기로 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상례복이 남아 있기 어렵다. 특히 상복은 탈상(脫喪) 이후 태우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전통 상복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제국 마지막 왕으로 칭해졌던 영친왕의 상례 착용일에 왕실 종친인 이해상과 부인 신계완이 착용한 상복은 남녀의 전통 상복 일습이면서도 착용자가 명확하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크다. 또한 이 상복은 후손들이 잘 보존하여 일습의 형태로 박물관에 기증되어 상복 일습에 포함된 굴건이 후학들에게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