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굴건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사용하였던 쓰개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썼던 굴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상주가 착용할 때는 굴건 안에 두건을 받쳐 쓰고 그 위에 수질을 이마에 둘러 고정한다. 영친왕의 재종질(再從姪)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굴건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정의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사용하였던 쓰개.
연원
형태 및 용도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31년(1598) 6월의 기록에 “굴관(건)의 높이가 매우 높아져 거의 1척이나 되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높이는 대체로 1척 미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굴건의 형태에 관하여 관(冠)의 꼭대기를 반으로 접은 후 접은 선이 똑바로 상향하도록 썼으므로 굴건이라고도 하였는데, 다산(茶山)은 “관은 응당 둥근 모양 그대로 써야 하며 꺾어서 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최관(衰冠)의 윗부분이 접힌 꺾인 형태와 둥근 형태가 함께 통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굴건을 고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무를 다는데 삼끈을 꼬아서 만들며 최관의 아랫부분을 통과하여 머리에 두르고 남는 끈을 귀 위치에서 늘어뜨려서 영을 만들고 이를 턱 아래에서 묶어 최관을 머리에 고정시킨다. 이 굴건의 높이는 36㎝, 너비는 17㎝이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사례편람(四禮便覽)』
-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단행본
- 강순제 외 8인, 『한국복식사전』(민속원, 2015)
논문
- 이영주, 『조선시대 국상 복제 연구』(동덕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 조우현, 『조선시대 상복에 관한 연구』(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 조우현·김혜경·동준희·박민재, 「『사례편람』에 기초한 남자 상복의 고증 제작에 관한 연구」(『복식』 66-8, 한국복식학회, 2016)
인터넷 자료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 국립민속박물관(https://www.nfm.go.kr))
- ‘영친왕 서거’(『대한뉴스』 제776호, 1970.05.09.)(http://www.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1011&mediadtl=6285)
기타 자료
- 『경향신문』(1970.05.0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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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조선 헌종 13년(1847)에 지은 전각. 후궁 김씨를 위해서 지었다 하며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거처한 곳이기도 하다.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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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발인할 때에, 문 앞에서 지내는 제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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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장사를 지낸 후 세 번째 지내는 제사. 흔히 가족들이 성묘를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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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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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육촌 형제의 아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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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예복에 갖추어 쓰던 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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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제사 때에 제관(祭官)이 쓰는 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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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옷, 그릇, 기구 따위의 한 벌. 또는 그 전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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