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장군 ()

증보사례편람 / 여자 상복
증보사례편람 / 여자 상복
의생활
의복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저고리와 치마를 하나로 연결하여 만든 여성 상복.
이칭
이칭
대수장삼(大袖長衫)
의복
재질
삼베
제작 시기
1970년
관련 의례
상례
소장처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대수장군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저고리와 치마를 하나로 연결하여 만든 여성 상복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의 부인인 신계완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착용했던 대수장군이 대표적이다. 큰소매의 웃옷[大袖]과 긴치마[長裙]를 하나로 연결한 여성 상복이다. 영친왕의 재종질(再從姪)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대수장군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정의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저고리와 치마를 하나로 연결하여 만든 여성 상복.
연원

대수장군(大袖長裙)은 대수(大袖)인 저고리와, 장군(長裙)인 치마를 하나로 연결하여 만든 상복으로, 대수장삼(大袖長衫)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대수장군은 1970년 5월 1일 낙선재(樂善齋)에서 거행된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91970)의 장례 때 이달용(李達鎔, 18831948)의 아들 이해상(19131985)의 부인 신계완이 입었던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대수장군을 포함한 이해상 내외 상복 일습은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상복은 총 9점으로, 굴건(屈巾), 건(巾), 수질(首絰), 최의(衰衣), 상(裳), 요질(腰絰), 중단(中單), 대수장군(大袖長裙), 행전(行纏) 등이다. 이해상은 고종(高宗) 황제의 사촌인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 18551922)의 아들인 이달용의 3남으로, 영친왕과는 재종질(再從姪) 관계의 인물이다. 상복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형태 및 용도

여자의 참최복(斬衰服)인 대수장군은 조선시대 왕비 이하 내명부(內命婦)의 부인들이 상중(喪中)에 입은, 큰 소매의 웃옷과 긴 치마를 연결하여 만든 옷이다. 참최는 남자와 같이 극추생마포(極麤生麻布)를 쓰고, 가장자리를 꿰매지 않고 시접을 밖으로 보낸다. 재최(齊衰)는 차등추생마포(次等麤生麻布)로 만들고 가장자리를 꿰맨다. 대공(大功)은 초숙포(稍熟布)로 만들고 소공(小功)은 초숙세포(稍熟細布)로 만들며, 시마(緦麻)는 세숙포(細熟布)로 각각 만들고, 재최 이하는 모두 가장자리를 꿰맨다.

이 대수장군은 큰 소매가 달린 저고리와 긴 치마를 연결하여 만든 것으로, 치마 12폭은 상의 앞 좌우 길에 3폭씩 하여 앞쪽 6폭, 뒤쪽 6폭이고 앞뒤 총 12폭을 연결하여 만든 의상연의(衣裳連衣) 형태이다. 저고리 길이는 42㎝, 치마 길이는 73㎝이며 총 길이는 115㎝이다. 화장은 78㎝, 뒷품은 60㎝, 치마 폭은 188㎝이다. 삼베 한 폭은 33㎝ 내외이며 치마는 허리에 맞주름을 잡아서 상의와 연결하였다. 앞가슴에 눈물받이인 최(衰)는 부착되어 있지 않고, 뒷길에 부판(負板)이 달려 있다. 대대(大帶)가 부판 아래를 지나 앞길 중심에서 고를 지어 맨다. 소매는 두리 소매처럼 넓고, 은 깃머리를 둥글게 하였고, 섶이 없이 앞 중심에서 여며진다. 길은 1폭, 소매는 1폭 반으로 마름질을 하였고, 길을 제외하고는 소매와 치마의 삼베 색상이 같으며 길은 약간 밝은 색상의 삼베이다. 시접은 모두 안으로 넣어서 마무리하였다.

원래는 참최상(斬衰裳)에서 참은 밑단을 풀어 놓은 것, 즉 꿰매지 않는 것을 의미하여 참최는 밑단을 정리하지 않는 봉제의 특징을 갖고 있다. 재최의 재(齋)는 상복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지런하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상복의 밑단을 꿰매어 정리하였음을 뜻한다.

의의 및 평가

1969년 「가정의례준칙(家庭儀禮準則)」 시행 이후, 상복을 간소화하고 노제(路祭)와 삼우제(三虞祭) 등을 없애기로 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상례복이 남아 있기 어렵다. 특히 상복은 탈상(脫喪) 이후 태우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전통 상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해상 내외 상복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으로 칭해졌던 영친왕의 상례 착용일에 왕실 종친인 이해상과 부인 신계완이 착용한 남녀 전통 상복 일습이면서도 착용자가 명확하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크다. 또한 이 상복은 후손들이 잘 보존하여 일습의 형태로 박물관에 기증되어 상복 일습에 포함된 대수장군이 후학들에게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사례편람(四禮便覽)』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논문

이영주, 『조선시대 국상 복제 연구』(동덕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조우현, 『조선시대 상복에 관한 연구』(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조우현·김혜경·동준희·박민재, 「『사례편람』에 기초한 남자 상복의 고증 제작에 관한 연구」(『복식』 66-8, 한국복식학회, 2016)

인터넷 자료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국립민속박물관(https://www.nfm.go.kr)
‘영친왕 서거’(『대한뉴스』 제776호, 1970.05.09.)(http://www.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1011&mediadtl=6285)

기타 자료

『경향신문』(1970.05.09.)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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