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양규의숙을 설립하고, 이 학교를 후원하기 위해 진학신, 진학주, 김운곡 등이 발기하여 설립되었다. 여자교육회는 본회와 교육기구, 찬무소(贊務所)라는 삼원적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사회적 명망 있는 남성들로 찬무소를 구성하고, 상류사회 여성들의 참여를 촉구하여 고관 및 유지들의 부인을 임원으로 임명하였다.
여자교육회는 1907년 3월 양규의숙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고 신학원(新學院)이란 여학교를 설립하였고, 다시 6월 20일에 개최된 통상회(通常會)에서 신학원을 여자보학원으로 개칭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여성잡지로 『여자교육지남(女子敎育指南)』, 즉 『여자지남』을 간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여자보학원 설립 후 여성교육회가 재정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아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결국 여자교육회는 여자보학원을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指會)에 양여하였고, 여자보학원유지회에서 다시 학생을 모집하여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1908년 5월 25일 『여자지남』 제1호가 발행되었는데, 잡지 발행 주체도 여자보학원유지회 측이었다. 잡지 제1호 발행 시점까지 여자교육회 측 인사들도 학교 운영과 잡지 발간에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08년 6월부터 여자보학원 귀속, 운영비 문제 등을 놓고 여자교육회와 여자보학원유지회 측은 갈등하기 시작하였다.
여자보학원유지회 측은 여자보학원이라는 교명을 여자교육회 측에 반환하고 양원여학교(養源女學校)로 교명을 바꿨다. 여자교육회는 학교 운영 문제를 계기로 이후 활동이 부진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여자교육회는 여성교육 활동 외에 여성복지를 위한 생명보험과를 설치하고 공립병원(共立病院)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한국 근대 초기 여성교육과 계몽을 목적으로 설립된 여성단체로 학교 설립, 여성 잡지 발행, 병원 설립 등 다양한 활동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재정 부족과 운영진의 갈등으로 인해 학교 운영과 잡지 발행이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