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개화·계몽주의자들에 의한 민족실력양성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부녀의 교육계몽도 실력양성운동에서 최우선적인 과제였기 때문에 곳곳에 여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를 후원하기 위한 각종 부인회·학회들이 조직돼 활동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1906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단체인 ‘여성교육회’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설립되었다.
여성교육회는 양규의숙(養閨義塾)을 세웠으며,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에 의한 양원여학교(養源女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진명부인회·대한여자흥학회·부인학회·양정여자교육회·여자교육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여자교육회의 부속학교로 1907년 봄에 한성에 설립된 여자보학원(女子普學院)의 운영이 3,000여원의 부채로 부실해짐에 따라 윤치오(尹致旿)등 사회유지 11명이 여자교육회에서 이를 독립시켜 운영하게 하기 위하여 여자보학원유지회를 발기, 조직하였다.
발기 당시 임시회장으로 윤치오가 선출되었으며, 임시서기 이달원(李達遠), 규칙위원 최재학(崔在學), 강윤희(姜玧熙), 통치위원에 강윤희, 이기영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여자보학원유지회는 유지들의 의연금에 의하여 운영되는 만큼 독립적인 경영과 유지가 어려웠다. 또 여자보학원을 위한 수천 원의 의연금이 답지하자 여자교육회와 강윤희 사이에 의연금을 중심으로 한 보학원 귀속문제가 불거졌으며, 한동안 싸움이 치열해졌다. 이에 1908년 6월에 여자보학원의 원장이던 강윤희(姜玧熙) 등 일단의 부인들과 유지자들이 여자보학원에서 완전히 분립된 새로운 여학교 양원여학교(養源女學校)를 설립하고, 그해 9월 초에 보학원 유지를 위한 새 보학원유지회가 재조직되었다.
『황성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1908년 6월에 여자보학원을 자퇴한 27명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양원여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양원여학교는 강윤희 등이 여자보학원에서 분립하여 설립한 여자교육기관이다.
양원여학교가 신설되면서 1908년 6월에 양원여학교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양원여학교 유지회를 후원단체로 조직하였다. 양원여학교는 처음에 임시로 종로에 있는 승동교회당에 개설하였다가 1908년 7월에 흥사단 소관의 국민교육회관으로 이전되었다.
양원여학교는 1910년 8월에 정동에 있던 영국종교회(英國宗敎會)의 소관으로 인계되어 매월 100원씩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후 1910년 동덕여자의숙과 동원여자의숙이 합병된 동덕여자의숙은 1911년 3월 동덕여학교로 바뀌었고, 1915년에는 관훈동에 2층 신식 건물을 지어 학교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 무렵 동덕여학교는 양심여학교와 양원여학교를 합병하였으며, 월남 이상재를 초대 회장으로 하는 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양원여학교는 7세 이상 13세까지의 여자를 모집하여 1908년 8월 25일에 개교하였다. 첫 입학자는 40여 명이고, 교사로는 신상민(경신학교 졸업자)의 부인인 신완전(申完殿)을 초빙하였다.
1908년 9월부터 야학생도 모집하여 특히 일본어와 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한편 여름방학 기간에는 여자 하기강습회를 열어 산술과목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쳤다. 1909년 7월에 특별과를 개설하고, 15세 이상 30세 이하의 부녀자들을 모집하여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영어·일어·산술·국문·한문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1910년도에 심상과(尋常科)와 고등과의 과정을 두는 한편 1910년 5월에는 6개월 과정의 양잠과(養蠶科)를 특설하여 여성들에게 양잠에 관한 기술교육도 실시하였으며, 1910년 8월에는 한문전문강습소도 개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