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6월 진학주(秦學胄)·진학신(秦學新) 등이 “학문과 여공(女工)의 정예(精藝)와 부덕순철(婦德順哲)을 교육하여 현모양처의 자질을 양성 완비한다”는 취지로 새문 밖에 있는 진학주의 집에 설립하였다.
진학신·고희준·진학주 등의 인사들은 여자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1906년 5월 여자교육기관으로 양규의숙을 설립하기 위한 발기인을 선정하였는바, 양규의숙의 설립 발기인은 진학신을 비롯하여 이순하(李舜夏)·정교(鄭喬)·진학주·이영규(李瑛奎)·김세용(金世庸)·최창각(崔昌珏) 등이었다.
양규의숙의 발기인들은 양규의숙을 통해 여성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한 후원단체로 여자교육회를 1906년 5월에 조직하였다. 양규의숙의 운영을 위한 후원단체인 여자교육회는 28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1906년 9월과 1907년 1월에 회원들로부터 의연금을 갹출하여 양규의숙의 운영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현모양처'라는 단어가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도 ‘만세보’ 8월 2일 자에서 양규의숙의 설립취지를 설명하는 과정에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양규의숙은 학생수가 늘어 4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하였으나 학교운영비가 모자라 1906년 12월에 정학(停學)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양규의숙에서는 유지들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학부에서도 1907년에 매월 30원(元)씩의 경비를 양규의숙에 지급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후원단체였던 여자교육회가 1907년 3월부터 양규의숙과의 관계를 끊고 신학원(新學院)이란 여학교를 신설함에 따라 양규의숙은 그 유지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에 1907년 6월 최화사(崔花士)·신숙당(申肅堂) 등 여러 부인들로 조직된 진명(進明)부인회가 양규의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게 되었다. 여성의 일반교육을 장려하고, 식산 및 여공의 계발 장려를 목적으로 하여 조직된 진명부인회는 발족하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양규의숙의 후원단체가 되어 매월 일정한 액수의 자금을 양규의숙에 보조하였다.
양규의숙은 입학자격을 연령 6세 이상 18세 이하의 여자로 하고, 수신·국문·한문·지지·수학·이과·재봉·습자·역사·어학·일어·영어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1906년 6월 25일에 36명의 학생으로 개교된 양규의숙은 숙장에 농상공부대신인 권중현(權重顯), 숙감에 이순하, 교사는 조선증의 부인인 이씨와 김린의 부인인 이씨 등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