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교육회의 여자교육 정상화를 위하여 1907년 봄에 여자교육회 부속학교인 여자보학원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여자교육회가 3,000여 원의 부채로 인하여 여자보학원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자 윤치오(尹致旿) 등 사회유지 11명이 여자교육회에서 이를 독립시켜 운영하게 하기 위하여 발기, 조직하였다.
발기 당시 임시회장 윤치오, 임시서기 이달원(李達遠), 규칙위원 최재학(崔在學)·강윤희(姜玧熙), 통치위원 강윤희·이기영이 선출되었다. 여자보학원의 교육방침은 학령 여아는 학교교육을, 성인부인은 『여자지남(女子指南)』을 통하여 교육하는 것으로, 1908년 5월에 『여자지남』 창간호를 간행하였다.
이는 여자개학(皆學)운동을 목적한 것이다. 여자보학원유지회는 유지들의 의연금에 의하여 운영되는만큼 독립적인 경영, 유지가 어려웠다. 여자보학원을 위한 수천원의 의연금이 답지하자 여자교육회와 강윤희 사이에 의연금을 중심으로 한 보학원 귀속 싸움이 치열하여졌다.
이에 1908년 6월에 여자보학원에서 완전히 분립된 새 여학교 양원여학교(養源女學校)를 설립하고, 그해 9월초에 보학원 유지를 위한 새 보학원유지회가 재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