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전(大韓禮典)』은 10권 10책의 필사본이다. 판식은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상이엽화문주어미(上二葉花紋朱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28.4㎝, 가로 20㎝,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 20.6㎝, 가로 15.5㎝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유일본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있다.
1897년(고종 34) 6월 3일 내부대신 남정철(南廷哲)의 건의로 사례소가 설치되었다. 사례소는 황제 즉위 의례의 제정과 황제국의 위상에 맞는 국가 전례를 정비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기구였다. 7월 1일부터 업무를 개시한 사례소는 직원과 과원을 충원하고 자료 수집과 정리 및 연구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채 1898년 10월에 폐지되었다. 그후 장지연 등에 의해 편찬 작업이 계속 이어져 마침내 그해 말경 10책으로 완성된 『대한예전』이 고종에게 바쳐졌다.
책머리에는 「수편(首篇)」이 실려 있으며, 내용은 크게 즉위의와 서례(書例), 의주(儀註)로 구성되었다. 즉위의는 권1에 해당하며, 서례는 권25, 의주는 권610이다.
권1은 『대한예전』의 편찬 의도와 성격을 잘 나타내는 고종의 황제 등극의와 그 후속 의주로 구성되었다. 국가 전례서 편찬의 전통 방식이 의주와 서례를 구분하여 별책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대한예전』도 그 방식을 따라서 『대한예전서례』를 먼저 편찬한 듯한데, 나중에 이 서례를 본 전례서 내에 포함시킨 것이 곧 권2이다. 변사(辨祀)와 시일(時日)부터 거가환궁(車駕還宮)까지의 길례 서례이다.
권3도 길례 서례로서 각 도설(圖說)들이 수록되었다. 「단묘도설(壇廟圖說)」에는 원구처럼 그림과 설명이 모두 들어 있거나 설명만 있는 단묘도 있다. 전사오악단 등은 소재지, 제도 그리고 신좌(神座)가 어느 단과 같다는 정도의 기록만 있다. 「재관(齊官)」은 모든 제사의 집사자와 인원수를 규정한 것이다. 「제기도설(祭器圖說)」에는 제기의 그림과 설명이 수록되었는데, 대체로 『국조오례의서례』를 모방하였다. 「찬실준뢰도설(饌實樽罍圖說)」에는 각 묘단의 제수 진설도와 설명이 수록되어 있고, 말미에는 천신서물(薦新庶物) 등의 부록이 있다.
권4 또한 기례 서례로서 악현과 악기 및 제복도설 등을 수록했다. 악현과 악기는 주1와 속부(俗部)의 악현도설(樂懸圖說)과 악기도설(樂器圖說)이며, 제복도설(祭服圖說)에는 황제의 면복과 황후의 관복, 황태자의 관복, 황태자비의 관복, 군신관복 등이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다음에 수록된 척도(尺度) 제도 역시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이어서 친경(親耕)에 관한 도구의 그림과 설명 등이 수록되었다.
권5는 가례(嘉禮) 서례로서 「의장도설(儀仗圖說)」과 「노부(鹵簿)」, 「관복도설(冠服圖說)」, 「악기도설」, 「준작도설(樽爵圖說)」, 「속부악장」, 「전정궁가도설(殿庭宮架圖說)」, 「고취도설(鼓吹圖說)」, 「무도(舞圖)」, 배반도 등이 수록되었다. 「납후제문(納后制文)」은 납채, 문명, 납길, 납징, 고기, 봉영 등 육례의 제문이다. 그 뒤에는 황자와 황녀 혼서식을 실었고, 「납후친영지도」가 그려져 있다. 「빈례서례(賓禮序例)」에는 사신 등급, 접대원 수, 연향도, 국서식 등이 수록되었는데, 모두 당시의 외교 관례에 따른 서식으로 바뀐 것이다.
권6~8은 모두 길례로서 원구를 비롯한 대사(大祀)와 선농 등 중사, 악진해독 등 소사, 기고 · 속제 · 부군사(府郡祀) 등으로 국가 제례를 구분하여 그 의주를 실었다. 권9는 가례로서, 조하(朝賀) · 상호(上號) · 책봉 · 납비(納妃) 등의 의주이며, 권10은 가례와 빈례, 군례(軍禮), 흉례 등의 의주이다. 빈례는 접견의와 연향례, 군례는 대사의와 향사의이며, 흉례는 모두 거애의(擧哀儀)이다.
이 전례서는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으나 당시 행하던 국가 전례를 그대로 반영하는 한편, 당시의 실정에 맞는 황제국 의례로 개편하여 편찬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고종의 황제 등극이 천명이었으며 조선의 정통을 계승했음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국조오례의』의 내용과 체제를 계승하여 황권의 정통성과 역사성 및 권위를 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황권의 확립과 국체의 안정적 유지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