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는 중국 고대에 동아시아 군주의 최고 칭호인 ‘황제(皇帝)’의 정실 부인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황제'보다 '후(后)'가 먼저 출현한 뒤 '황'과 '후'가 결합하여 성립하였다. 조선에서는 '왕(王)'과 '후'가 결합한 '왕후(王后)'라고 표현하여 왕비 사후에 추증하는 시호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의례가 격상되면서 생존 시의 왕비 또한 '왕후'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사망한 왕후 민씨는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되었다.
동아시아 군주의 최고 칭호였던 ‘ 황제’의 정실 부인을 뜻하는 호칭인데, 군주의 부인을 뜻하는 ‘후’라는 호칭은 기록상 ‘황제’보다 먼저 등장한다. 즉 중국 고대 주(周)나라에서 천자(天子)가 1명의 ‘후’를 둘 수 있다고 규정되었던 것이다. 비록 ‘황제’라는 호칭을 제정한 것이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이지만 그의 부인으로 ‘황후’ 칭호를 받은 이에 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문헌에서 황제의 배필로 등장하는 ‘황후’라는 호칭이 처음 붙여진 인물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부인인 고황후(高皇后) 여치(呂雉, 서기전 241~서기전 180)였다. 이후로 황제국과 제후국을 구별하는 조공-책봉 체제가 보다 분명하게 확립됨에 따라 ‘후’는 ‘황’과 연결되어 황제의 정실 부인을 말하는 호칭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후’라는 호칭은 경우에 따라서는 간혹 ‘군후(君后)’ 등의 표현으로 임금 그 자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임금의 배우자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는데, 다만 ‘황제’보다 ‘후’가 먼저 출현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 왕후’의 표현으로 쓰였다. 이후 황제국과 제후국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체제가 정착된 이후로도 이러한 관성이 일부 남아서 ‘왕후’ 호칭은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생존한 왕비에게 모후(母后) · 적후(嫡后) 등의 호칭을 쓰기도 하였다.
황제국 체제의 격식이 확립되면서 황제의 후궁이나 제후의 배우자를 뜻하는 호칭으로 ‘비(妃)’가 등장하여 ‘후’가 ‘비’보다 우선하는 서열이 생겨났으며, 제후국의 경우 ‘비’ 아래에 ‘ 빈(嬪)’이라는 명칭으로 국왕의 후궁 또는 왕위 계승권자의 배우자를 지칭하였다. 따라서 서열상으로 보면 ‘후’ - ‘비’ - ‘빈’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원칙상 ‘후’는 황제국의 정실부인에게만 붙일 수 있는 호칭으로 ‘황제’의 ‘황’과 결합하여 ‘황후’로 사용되었으며, 앞에 ‘태(太)’자가 붙은 ‘ 태후(太后)’의 표현으로 황제의 어머니를 지칭하였다. ‘비’의 경우 ‘왕’과 결합하여 ‘왕비’로 사용되며 제후국 군주의 정실부인을 지칭하였다. 앞에 ‘대(大)’자가 붙어 국왕의 모친을 이르는 호칭인 ‘ 대비(大妃)’로 쓰이거나 황제국의 후궁 또는 황위 계승권자의 부인을 이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빈’의 경우는 제후국 군주의 후궁 또는 왕세자의 정실부인을 이르는 호칭인 ‘세자빈(世子嬪)’ 등의 용례로 사용되었다.
경칭의 경우 배우자인 황제나 국왕에게 사용되는 것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황후에게는 황제에게 사용되는 '폐하(陛下)'를 적용하였으며, 왕비는 국왕에게 쓰는 '전하(殿下)'를, 세자빈에게는 세자에게 붙이는 '저하(邸下)'를 그대로 썼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몽고어에서 기원하여 범용적인 경칭으로 쓰였던 ‘마마(媽媽)’ 또한 널리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대에는 국왕의 배우자에게 ‘비’ · ‘후’ · ‘ 부인(夫人)’ 등의 명칭이 혼용되었는데 그 사용 기준은 불분명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대외적으로 제후국의 격식을 사용하되 내부적으로 황제국의 격식을 일부 원용하는 외왕내제(外王內帝)의 원칙에 따라 국왕의 부인을 ‘왕후’로 지칭하고 해당 호칭으로 사후 시호를 올렸다.
그러나 원 간섭기에 격식이 격하된 뒤 제후국 체제의 격식을 원용하는 조선에 들어와 ‘왕비’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의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사후 시호 추증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의들이 복잡하게 전개된 끝에, 조선 국왕의 정실 배우자는 살아 있을 때에는 ‘왕비’에 봉작되지만 사후에는 ‘왕후’로 추존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고종 대까지 이러한 체제가 지속되었다.
이후 1894년에 청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청나라와의 전통적 사대관계 단절이 화두가 되면서 ‘주상 전하(主上殿下)’를 ‘대군주 폐하’로 고치는 등 의례상 격식이 변동하였고, 이에 따라 왕의 배우자에 대한 호칭 또한 사후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도 ‘왕후’로 변경되면서 기존의 ‘왕비전하(王妃殿下)’ 호칭이 ‘왕후폐하(王后陛下)’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고종의 배우자인 왕비 민씨 또한 왕후가 되었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서 살아 있을 때에 왕후가 된 일로 유일하였다.
왕후 민씨는 1895년 을미사변 때에 시해되었으며,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의 지위에 오름에 따라 명성황후로 추존되어 같은 해에 황후의 위상에 해당하는 의례로 국장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 황제국 체제의 운용 경험이 전혀 없었던 관계로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의식이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영친왕(英親王)을 낳으며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채웠던 엄비(嚴妃)가 황후가 되기 위해 막후에서 정치인들을 움직여 승후(昇后)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종의 다음 황제인 순종의 경우 첫 번째 부인인 민씨는 황태자비일 때 사망하여 사후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로 추존되었다. 또한 계비로 책봉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 윤씨는 불과 3년 동안이기는 하였으나 조선 역사상 살아서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에 따라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 황실의 일부인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었고,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 남북한 모두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채택함에 따라, 한국의 황후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황후는 동아시아 군주의 최고 칭호인 황제의 정실 배우자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근대 이전에는 황제국의 위상을 대외적으로는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에 '황후'를 쓰지 않고 '왕'과 '후'를 결합한 '왕후'라는 절충적인 형태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중국 중심의 사대질서라는 국제질서 아래에서 외교관계상의 마찰을 피하는 범위 안에서 가급적 국가 위상을 제고하려는 정책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대한제국기의 황후는 그 존재 기간이 극히 짧았지만, 한국 역사상 공개적으로 ‘황후’ 호칭을 사용하며 존재하였던 유일한 경우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