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은 전통 시대 왕의 배우자 및 외명부(外命婦)의 칭호이다. 중국식 부인 칭호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마립간 시기부터였다. 왕비에 대한 부인 칭호의 사용은 고려에도 이어졌다. 고려에서 부인은 주로 궁부인·원부인의 형태로 사용되다가, 궁주·원주 칭호의 등장으로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조선에서는 내명부(內命婦)의 칭호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부인이 외명부로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부터였다. 외명부 제도가 더욱 정비된 조선에 이르면, 부인 칭호는 종친과 문무 관인의 처를 나누어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부인(夫人)은 전근대사회에서 자신 또는 타인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존칭이었는데, 점차 내관제도의 정비에 따라 왕비의 지위와 신분을 보여주는 작호(爵號)가 되었고, 나아가 외명부의 작칭(爵稱)으로까지 사용 범주가 확대되었다.
중국에서 ‘부인’ 칭호는 비교적 일찍 사용되었다. 그것은 한(漢) 무제(武帝) 시기[서기전 2세기]에 발견된 『주관(周官)』에 “부인, 빈(嬪), 세부(世婦), 여어(女御) 등의 지위가 있어 천하의 내치(內治)를 다스리게 하였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봉호(封號)로서의 ‘부인’은 대개 첩칭(妾稱)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한에서 황제의 첩실들을 부인으로 봉했던 점, 당에서 귀비(貴妃) · 숙비(淑妃) · 덕비(德妃) · 현비(賢妃)를 ‘4부인(四夫人)’이라 불렀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부인은 위와 같은 작호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신 또는 타인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그 점은 『 논어』 권16 계씨(季氏)에 “임금의 아내를 임금이 부를 때에는 ‘부인’이라고 하고 부인이 스스로 부를 때는 ‘소동(小童)’이라고 하며 나라 사람들이 부를 때에는 ‘ 군부인(郡夫人)’이라 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부를 때에는 ‘과소군(寡小君)’이라 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를 때에도 ‘군부인’이라고 한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최상층 여성의 존칭으로 쓰였던 부인 칭호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일찍이 중국과 같은 의미로서 부인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기록상 최초의 부인 칭호로는 제12대 왕 중천왕(中川王) 4년의 관나부인(貫那夫人)이 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왕후(王后) · 왕태후(王太后) · 소후(小后) 등의 작호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관나부인의 부인 칭호는 후비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신라는 이사금(尼師今) 시기부터 부인 칭호가 사료에 보인다. 제2대 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비 운제부인(雲帝夫人), 제4대 왕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의 비 아효부인(阿孝夫人)이 그 사례이다. 다만, 왕호를 신라의 고유어로 쓰던 시기에 중국식 칭호인 부인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기 어려우므로, 이는 후대에 소급 적용한 사례로 파악된다.
중국식 존칭으로서 부인 칭호의 본격적인 사용은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고 외래 문화를 다방면에서 수입하였던 마립간(麻立干) 시기부터였다. 한편, 제19대 왕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 시기부터 부인 칭호의 사용 범주가 확대되었다. 박제상(朴堤上)이나 김유신(金庾信)의 처를 부인으로 책봉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동안 왕의 어머니와 처에 한정되던 부인 칭호가 일반 여성의 칭호로 확대된 것이다.
고려에서는 국초부터 왕실의 여성에게 부인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국초에는 아직 정해진 제도가 없었다. 후비 이하는 ‘원부인(院夫人)’ 또는 ‘~궁부인(宮夫人)’이라 불렀다.”라는 『 고려사(高麗史)』의 기사에서 알 수 있다.
실제로 고려 왕실의 여인들은 궁 · 원 · 전이라 불리는 특수한 건물에 거주하였고, 자신이 거주하는 궁 · 원의 이름에다 ‘부인’을 덧붙인 칭호를 부여받았다. 예를 들어, 대량원(大良院)에 거처하면 ‘대량원부인’이라는 칭호가, 연창궁(延昌宮)에 살면 ‘연창궁부인’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고려사』는 “임금의 적처에 대한 칭호는 왕후이며, 첩에 대한 칭호는 부인”이라고 하여, 부인 칭호를 중국과 마찬가지로 첩칭으로 보았다. 하지만 다처제(多妻制)를 이루고 있던 고려 왕실에서 부인 칭호는 첩칭이 아니었다.
한편, 고려에서는 부인의 칭호로 왕실 내의 위상 변화를 반영하였다. 예를 들어,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태조 4비]는 처음에는 ‘황주원부인(黃州院夫人)’에 불과했는데, 손자인 성종의 즉위를 계기로 ‘명복궁대부인(明福宮大夫人)’으로 책봉되었다. 원부인에서 궁부인으로, 부인에서 대부인으로 칭호의 격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국초에 많이 사용되었던 원부인 · 궁부인의 칭호는 현종 대에 궁주 · 원주 칭호의 본격적인 사용을 계기로 왕실 여인의 칭호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나갔다.
고려에서 부인은 외명부의 칭호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문무상참관(文武常叅官) 이상의 부모와 처를 봉작했던 성종 대를 전후하여 외명부 제도가 정비되었고, 그것이 『고려사』의 내직조(內職條)에 수렴되었다.
내직조에는 정3품의 국대부인(國大夫人)과 정4품의 군대부인(郡大夫人)이 부인 칭호로서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인(大夫人)은 관원의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칭호였으므로 실제로 부인에게는 부인의 칭호가 주어졌다. 이러한 외명부 칭호는 1391년(공양왕 3)에 재정비되어, 문무 1품의 정처(正妻)는 ‘소국부인(小國夫人)’으로, 2품의 정처는 ‘대군부인(大郡夫人)’으로, 3품의 정처는 중군부인(中郡夫人)으로 봉하였고 그 어머니는 모두 ‘대부인’으로 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적서제(嫡庶制)의 확립과 비빈제도(妃嬪制度)의 정비가 이루어져 왕의 배우자 칭호로서 부인을 쓰는 일은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내명부와 함께 외명부 제도가 더욱 정비되었다.
1396년(태조 5)에 명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품관의 처에게 외명부를 수여했는데, 부인 칭호는 고관의 처에게 제수되었다. 즉, 1품관의 처는 군부인이, 2품의 처는 현부인(縣夫人)이 되었다. 이러한 외명부 제도는 『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단계에 이르면 종친(宗親)과 문무 관인의 처를 나누어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종친의 처에게는 정1품 부부인(府夫人)에서 정3품 신부인(愼夫人)까지, 문무관(文武官)의 처에게는 정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에서 정3품 숙부인(淑夫人)까지 각종 부인 칭호를 남편의 관계에 상응하여 제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