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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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임금의 생존한 정비(正妃), 혹은 왕비 사후에 올리는 시호.
이칭
이칭
왕비, 중궁(中宮), 중전(中殿), 내전(內殿), 곤전(坤殿)
내용 요약

왕후는 생전 임금의 부인이나 사후의 임금 부인에게 시호로 올리는 칭호이다. 대체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왕후는 살아 있는 왕의 정비인 왕비에게 붙여진 호칭이었다. 하지만 점차 작고한 왕비에게 올리는 칭호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의 왕후는 왕의 정비가 승하한 후에 올리는 칭호였다.

목차
정의
임금의 생존한 정비(正妃), 혹은 왕비 사후에 올리는 시호.
변천사항과 현황

왕후 칭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작고한 임금에게 ‘대왕(大王)’을 칭한 것처럼 작고한 왕비에게 올린 칭호였다. 그러나 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까지는 살아있는 임금의 정비(正妃) 호칭이기도 했다.

삼국시대 이후 왕의 정비를 왕후라 했지만, 삼국시대에는 부인(夫人)이라 칭한 일도 있었다. 신라의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어머니는 알영(閼英) 주2, 비(妃)는 운제(雲帝) 주17이었으며,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의 어머니는 사성(史省) 주21, 비는 애례(愛禮) 주19이었다.

신라에서 왕후의 호칭은 30대 문무왕의 비를 자의(慈儀) 왕후라 칭한 것이 처음이다. 37대 선덕왕의 비도 처음에는 구족(具足) 부인이었으나 구족 왕후로 격상하였다. 이때 왕후의 칭호는 생전에 붙여진 것이다. 왕후는 살아있을 때 주어지는 칭호였으나, 신라 중대 이후에는 작고한 정비에게도 왕후 칭호를 올렸다. 29대 주9의 비는 훈제(訓帝) 부인인데 문명(文明) 왕후로 추존되었다. 이후 42대 흥덕왕의 비 장화(章和) 주6도 세상을 떠난 후 정목(貞穆) 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처럼 신라 중대 이후부터 왕후라는 호칭이 생전에 붙여지기보다 시호로 부르게 된 것은 중국식 시호법이 지증왕 때부터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백제에서 왕후는 추증된 존칭이 아니라 살아 있는 왕의 정비에게 붙여진 호칭이었다. 고구려의 9대 고국천왕의 비 우씨(于氏)가 왕후로 책봉되었고, 12대 중천왕의 비이자 우수(于漱)의 딸 연씨(掾氏)가 왕후로 책봉되었다. 게다가 13대 서천왕이 관나(貫那) 주7주8로 삼으려고 한 점에서 생전의 왕비를 왕후로 호칭했으며, 측실을 부인 또는 소후로 칭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는 9대 책계왕(責稽王)이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고 15대 침류왕의 어머니를 아미(阿彌) 부인, 전지왕의 비를 팔수(八須) 주10이라 불렀다. 13대 근초고왕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임명된 진정(眞淨)이 왕후의 친척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백제는 부인 · 왕후의 칭호를 혼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에서의 왕후가 신라에서와 같이 시호로 추증되어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시대에 왕후의 호칭은 지금까지 함께 왕의 배우자를 지칭해 오던 부인의 칭호와 구별되었다. 후비열전(后妃列傳)에 따르면, 왕모(王母)는 왕태후(王太后), 왕의 적실은 왕후, 후궁은 부인이라 칭하다가 8대 현종 때부터 비(妃) 역시 후궁의 호칭으로 썼다. 선왕의 정비인 왕후는 대체로 왕태후로 주22,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왕의 생모 혹은 국공을 낳은 왕후는 왕태후로 주11 되어 다른 왕후들보다 그 위상이 높았다.

고려 초기에 왕후는 생전 임금의 부인에게 붙여진 호칭이었으나 이후 점차 작고한 왕비에게 시호로 올리는 존칭이 되었다. 8대 현종의 7명의 후비는 처음부터 왕비에 책봉되거나 왕의 딸로 왕비가 되거나 소생 중에서 왕이 있는 경우에 추증되었다. 성종의 딸인 원정왕후(元貞王后) 김씨는 현종이 즉위할 때 왕후가 되어 주12라 칭했다가 별세한 뒤에 원정왕후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원화왕후(元和王后) 최씨 역시 성종의 딸로서 처음엔 항춘전(恒春殿) 주13라 칭했다가 별세한 뒤에 원화왕후로 추증되었고, 김은부(金殷傅)의 딸인 원성태후(元城太后) 김씨는 처음 주23라 하다가 뒤에 왕후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이후 작고한 뒤에 원성왕후라 추증되고 아들 덕종이 즉위하자 왕태후로 추존되었다. 이외에 원용왕후(元容王后) 유씨(柳氏), 원목왕후(元穆王后) 서씨, 원평왕후(元平王后) 김씨 모두 사후에 왕후로 추존된 것이다. 이로써 보면 현종이 승하한 뒤에 ‘원문대왕(元文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린 것처럼, 고려시대에 왕후 또는 태후는 이와 대칭되는 칭호로 정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원 간섭기에 이르러 고려 왕들이 원의 부마가 됨에 따라 몽고 출신의 왕비를 생전에는 본래의 작위인 ‘공주’라고 불렀다가 사후에 왕후로 추존하였다. 고려 왕 가운데에 처음으로 원의 공주를 배우자로 맞이한 충렬왕은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 안평공주(安平公主)를 왕후가 아닌 원의 공주 작위를 쓰게 하다가 그녀가 사망하자 인명왕후(仁明王后)로 추존했다. 그러나 이후 원으로부터 제국대장공주로 추봉됨에 따라 고려에선 또다시 왕후 또는 왕태후로 부르지 않고 원의 공주로서 국모가 된 여성을 공주의 칭호로 불렀다.

그러나 공주의 호칭도 원 간섭기가 끝나자 작고한 정비에게 올리는 시호로 다시 왕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1365년(공민왕 14) 주14가 난산으로 사망하자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로 추존되었다가 우왕 때는 인덕태후(仁德太后)라 불렸다.

조선에서는 명의 제후국 의례를 적용하면서 국모의 칭호를 후(后)에서 비(妃)로 정했다. 그러나 1396년(태조 5)에 태조의 비 현비 강씨가 승하하자 왕후의 호칭이 부활하여 신덕왕후로 추존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이미 죽은 태조의 비 한씨를 신의왕후로 추존하였다가 태조가 서거한 이후인 1408년(태종 8)에 신의왕태후로 다시 추존하였다.

1430년(세종 12)에 제후국에서 태후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지적에 따라 이후에는 왕비가 승하하면 태(太)를 뺀 왕후로 추존하도록 정하였다. 이때를 기준으로 조선의 국모는 생전에 왕비에 봉작되었다가 사후에 왕후로 추존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1894년(고종 31)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왕실 작호가 전면 개정되면서 임금의 부인이 작고한 후에 왕후로 추존하는 규례를 없애고 살아생전에 왕의 배우자를 왕후로 삼도록 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로써 고종의 비 명성왕후 민씨는 생전에 왕후로 불린 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적서제(嫡庶制)가 확립되어 적실은 1명으로 한정되어 별세한 뒤에 왕후로 추증되었다. 왕비가 죽거나 폐출되었을 경우에만 주15를 맞이할 수 있었으며, 이들도 죽은 뒤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내명부에 속한 임금의 후궁이 왕비로 책봉된 경우가 있었는데 이들 역시 사망한 이후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성종의 비 주16 한씨는 한명회(韓明澮)의 딸로 성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1474년(성종 5) 4월에 작고하자 공혜왕후로 추존되었고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는 윤호(尹壕)의 딸로서 처음 종 2품 숙의(淑儀)로 입궁했다가 폐비 윤씨의 뒤를 이어 1480년(성종 11)에 계비로 승격되고, 1530년(중종 25) 8월에 죽자 정현왕후로 추존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선원계보(璿源系譜)』
『경국대전(經國大典)』

단행본

정용숙, 『고려시대의 후비』(민음사, 1992)
주석
주1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B.C.53?~?). 현숙함과 덕망으로 왕을 내조하였으며, 육부(六部)를 순행하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였다. 우리말샘

주2

신라 시조 혁거세의 비(B.C.53~?). 출신지는 알 수 없으며 아로와 차차웅의 어머니이다. 우리말샘

주3

신라 차차웅의 비(?~?). 유리왕과 아효 부인의 어머니이다. 우리말샘

주5

신라 지마왕의 비(?~?). 성은 김(金). 갈문왕 마제(葛文王摩帝)의 딸이다. 지마왕과의 사이에 딸 내례(內禮)가 있다. 우리말샘

주6

신라 흥덕왕의 비(?~826). 성은 김(金). 신라 소성왕 의 딸이다. 흥덕왕이 죽은 뒤 합장되었다. 우리말샘

주7

고구려 제12대 중천왕의 소실(?~251). 고구려 5부족의 하나인 관노부(貫奴部) 출신으로, 왕비 연씨(椽氏)를 질투하여 모함하였다가 251년 4월에 중천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우리말샘

주8

작은 왕후. 우리말샘

주9

신라의 제29대 왕(602~661). 성은 김(金). 이름은 춘추(春秋). 묘호는 태종(太宗). 율령을 정비하고,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재위 기간은 654~661년이다. 우리말샘

주10

백제 전지왕의 비(?~?). 해씨(解氏) 출신으로 추측되며, 제19대 구이신왕의 어머니이다. 우리말샘

주11

봉작(封爵)과 증직(贈職)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2

고려 현종의 비(?~1018). 성은 김(金). 문화 왕후의 소생이다. 우리말샘

주13

고려 제8대 왕 현종의 두 번째 비(?~?). 제6대 왕인 성종의 딸이며, 현종의 첫 번째 비인 원정 왕후와 이복 자매 사이이다. 슬하에 효정(孝靜)과 천수전주(天壽殿主)를 낳았다. 우리말샘

주14

고려 공민왕의 왕비(?~1365). 중국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로 공민왕 14년(1365)에 난산(難産)으로 죽었다. 우리말샘

주15

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 우리말샘

주16

조선 성종의 비(妃)(1456~1474). 성은 한(韓). 영의정 한명회의 딸로, 1469년에 성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성종 5년에 19세로 소생이 없이 죽었다. 우리말샘

주17

신라 차차웅의 비(?~?). 유리왕과 아효 부인의 어머니이다. 우리말샘

주19

신라 지마왕의 비(?~?). 성은 김(金). 갈문왕 마제(葛文王摩帝)의 딸이다. 지마왕과의 사이에 딸 내례(內禮)가 있다. 우리말샘

주20

구슬픈 소리. 우리말샘

주21

신라 파사 이사금의 비(?~?). 성은 김(金). ≪삼국사기≫에는 허루 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사성 부인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사초 부인(史肖夫人)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 두 군데에 나온 것으로 보아 ‘肖’는 ‘省’의 오기로 보인다. 아들은 지마 이사금이다. 우리말샘

주22

우러러 공경하며 받들다. 우리말샘

주23

고려 현종의 비(?~1028). 아버지는 김은부(金殷傅)이며 어머니는 인천 이씨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현종 2년(1011)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을 갔던 현종이 개경으로 환궁하던 길에, 절도사 김은부의 집에서 묵게 된 인연으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우리말샘

주24

고려 충렬왕의 비(1259~1297).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중국 원나라 세조의 딸로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체류할 때에 결혼하였으며 충선왕을 낳았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미선(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한국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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