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9대왕이다. 재위 기간은 179년~197년이며, 신대왕의 둘째아들로 176년(신대왕 12) 태자에 책봉되었다. 184년 후한 요동태수의 침입을 격퇴하고, 190∼191년에 걸친 좌가려와 어비류의 난을 진압하는 등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또 왕비족과 연합하여 왕권지지 기반을 확대함으로써, 초부족적 지배 질서의 수립과 왕권 강화에 힘썼고, 왕위계승 방법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전환했다. 191년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고 진대법을 실시하여 궁핍한 농민들에 대한 구휼책을 마련했다.
이름은 남무(男武)이며 국양왕(國襄王) 또는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신대왕(新大王)의 둘째아들이다. 176년(신대왕 12)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신대왕이 승하한 뒤 국인(國人)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184년 후한(後漢) 요동태수(遼東太守)의 침입을 격퇴시키는 등, 고구려 사회의 성장을 저지하는 외부세력의 압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180년 제나부(提那部: 椽那部) 우소(于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왕비족과의 결탁을 통한 왕권지지 기반을 확대함으로써, 초부족적 지배 질서의 수립과 왕권 강화에 힘썼다.
190∼191년에 걸친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於卑留)의 난을 진압했고, 194년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해 궁핍한 농민들에 대한 구휼책을 마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한 진대법의 실시는 왕권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농민들과의 결탁을 저지함은 물론,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려는 정책적인 배려였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들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 위해 지배세력 내의 많은 반발에도, 191년 을파소(乙巴素)를 국상(國相)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왕위계승 방법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부족명을 의미하는 부명(部名)이 단순한 방위명(方位名)으로 변화를 보이는 사실을 일컬어 왕권 및 초부족적 지배 질서를 강화하려는 일환에서 나타난 것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고국천왕의 실재를 부인하려는 견해도 있다.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 등의 중국측 기록에 입각해, 신대왕(新大王) 백고(伯固)가 승하한 뒤 왕위를 계승한 것은 산상왕(山上王) 이이모(伊夷模)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의 왕계 관련 기사의 경우 종종 착오나 누락이 확인된다. 특히 백고가 궁(宮: 태조왕)의 아들이라고 한 부분은 『후한서(後漢書)』에는 수성의 아들이라고 한 기록과도 차이나 난다. 또한 고국천왕 당시는 중국이 황건적(黃巾賊)의 난과 군웅할거(群雄割據) 등으로 말미암아 일대 혼란기였으므로, 주변 지역에 대한 중국측 기록의 신빙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때문에 『삼국지』 기록에만 의거해 고국천왕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 고국천왕은 사후 고국천원(故國川原)에 묻혔는데 이곳이 국내 지역이라는 이유로 고국천왕의 실재를 부정하기도 한다. 즉, 이이모와 발기 가 왕위계승 분쟁과 공손씨의 침공 등으로 ‘갱작신국(更作新國)’하였다는 것이 이이모(산상왕) 때에 집안으로 천도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도 이전에 환인(桓因)에서 죽은 고국천왕이 집안에 묻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천도가 같은 집안 지역의 국내성에서 산성자성(山城子城)으로 옮긴 경우라고 보는 것과 장례 절차에 100여일의 기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감안해서 고국천왕 사후 새로운 도읍지에서 충분히 장사를 지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