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왕 ()

고대사
인물
고구려의 제10대(재위: 197년~229년) 왕.
이칭
이칭
연우(延優), 이이모(伊夷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227년
출생지
고구려
주요 관직
고구려 제10대 국왕(재위: 197∼2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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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산상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97~229년이며,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비 우씨와 귀족 세력의 추대로 즉위했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해 산다는 취수혼의 실제 예로서 유명하다. 형 발기가 소노부 세력과 연합해 모반하고, 요동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공손씨 군대까지 불러들여 수도를 공격하자 동생 계수를 시켜 물리쳤다. 198년 환도성을 쌓고 209년 이곳으로 천도했다. 217년에는 중국 평주 출신의 하요 등 1000여 호의 투항을 받아들여 책성에 안치했다. 227년 사망하자 산상릉에 장사지냈다.

정의
고구려의 제10대(재위: 197년~229년) 왕.
개설

이름은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위궁(位宮)이라고도 한다고 했으나 이는 산상왕(山上王)의 아들인 동천왕(東川王)의 일명이므로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대왕(新大王)의 아들이며,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동생이다.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于氏)를 비롯한 귀족 세력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비는 형수였으며 즉위에 공이 많았던 제나부(堤那部, 椽那部 · 絶奴部) 출신의 우씨이다.

생애 / 활동사항

연우(이이모)와 우씨의 결합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해 산다는 취수혼(娶嫂婚: levirate)의 구체적 실례로서 유명하다. 부여와 고구려 및 북방 여러 민족에게 나타나는 취수혼은 형제 동류의 친족들 사이에 강한 공동체적 유대를 존속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족장위(族長位)가 형제상속 되고 있었으며, 초기의 왕위계승 역시 형제상속 형태였다는 점에서 고구려 초기에는 취수혼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후(小后)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으로, 209년(산상왕 13)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자 교체(郊彘)를 낳았다.

즉위하던 해인 197년 형 발기(發岐 또는 拔奇)가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해 소노부(消奴部) 세력과 더불어 모반하였다. 뿐만 아니라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위세를 떨치고 있던 공손씨(公孫氏)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수도를 공격하자, 동생 계수(罽須)를 시켜 이를 물리쳤다.

이렇듯 발기를 도와 고구려의 분열을 조장하는 등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공손씨와의 긴장 관계가 재위 기간 동안 계속되어, 공손씨의 영역인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현도군을 공격하자 현도군도 요동군(遼東郡)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2세기에는 후한(後漢)의 변경 일대를 석권하여 이 지역에 강력한 세력권을 구축했지만, 공손씨 정권 성립 이후 공손씨 정권이 이 지역의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손씨 정권은 요동을 근거로 흥기했기 때문에 요동 지역을 두고 고구려와 공손씨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한편 217년 중국 평주(平州: 요동 · 요서 지방) 출신의 하요(夏瑤) 등 1,000여 호의 투항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안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는 아직 평주라는 지방 단위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하요 등을 공손씨 세력권 내의 주민이라 볼 경우, 이를 통해 공손씨와의 대립 관계의 일면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198년 환도성(丸都城)을 쌓고 209년에 이곳으로 천도했다고 하는데, 이에 따라 고구려의 집안(集安) 천도를 산상왕 대의 사실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반대 견해도 있다. 227년 5월에 죽어 산상릉(山上陵)에 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제4에는 「산상왕설화(山上王說話)」가 수록되어 있는데, 산상왕의 ‘즉위 설화’와 ‘후사(後嗣) 설화’로 나누어진다.

즉위 설화는 산상왕의 왕위 획득에 따른 왕실 내의 정치적 갈등을, 후사 설화는 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주통촌(酒桶村)의 미녀와 관계해 후사를 얻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 두 설화는 고구려 초기 왕위와 후사를 둘러싼 왕실의 이야기가 후대에 전승되면서 설화화한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지(三國志)』
「3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정책」(여호규, 『역사학보(歷史學報)』194, 2007)
「4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삼국의 대외관계」(임기환, 『역사와 현실』36, 2000)
『고구려사 연구』(노태돈, 사계절,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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