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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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의 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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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구려시대의 성(城).
내용

고구려 동북부의 요충지로서, 435년 장수왕(長壽王)대에 고구려를 방문했던 북위(北魏)의 사신 이오(李傲)는 ‘고구려의 동북 영역이 책성(柵城)을 경계로 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책성이란 이름의 연원과 관련해 북옥저(北沃沮)의 다른 이름인 치구루(置構婁)와 관련시켜 비교해 보기도 한다. 즉 ‘구루(溝婁)는 곧 성(城)’을 일컫는 고구려말로, 치구루는 치성(置城)으로 책성의 음(音)과 통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름을 통해서도 책성은 북옥저의 중심지에 설치된 고구려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책성의 축성(築城)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문헌에는 태조왕(太祖王)이 서기 98년(태조대왕 46)과 102년 두 차례에 책성을 순수(巡守)한 기록이 처음이다. 또 217년에는 한(漢)나라의 평주(平州)에서 망명한 하요(夏瑤) 등 1천여 가(家)를 책성에 안치(安置)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즉 책성은 고구려 초기부터 매우 중요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왕(廣開土王)이 410년(영락 20)에 정벌한 동부여(東夫餘)의 수도인 여성(餘城)이 책성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 후기에도 책성에는 도독(都督) 즉, 욕살(褥薩)이라는 최고의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동북부 지방통치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 후기의 책성 도독으로는 「고자묘지(高慈墓誌)」에 보이는 고량(高量)을 들 수 있다.

책성의 위치는 두만강 하류지역으로 비정되는 것은 분명한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훈춘(琿瑃)의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이나 살기성(薩其城)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고구려 책성과 발해 책성의 위치를 구분해 중국 연길(延吉)의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토성촌토성(土城村土城), 흥안고성(興安古城)을 함께 합하여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이들 산성 모두 고고학적 발굴 결과, 유물이나 성벽 구조 등에 있어 고구려 산성으로 밝혀졌다.

이외에도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와 동일한 곳으로 파악하여 훈춘 팔련성(八連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는데, 이 경우 고고학적 발굴 결과 고구려 때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여러 견해의 차이가 생기게 된 이유는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 발해의 동경은 예맥(濊貊)의 고지(故地)에 있었고, 용원부 혹은 책성부(柵城府)라고 했다는 기사를 이해하는 방법과, 북옥저 영역의 소속 범위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위서(魏書)』
「고자묘지(高慈墓誌)」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만주역사지리(滿洲歷史地理)』
「고구려 책성 유지 삼고(高句麗 柵城 遺址 三考)」(박진석, 『동북아역사논총』20, 2008)
「부여국의 경역과 그 변천」(노태돈,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고구려 책성의 위치에 대한 고찰」(방학봉, 『경기사학(京畿史學)』3,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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