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1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05~420년이다. 태자시절 왜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부왕 아신왕이 죽자 귀국하던 중 아신왕의 막내아들 설례가 왕위를 찬탈했다. 귀족 세력인 해씨 세력과 그 지지 세력에 의해 설례가 진압되고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치구도가 변하여 해씨 세력이 크게 부상하고 진씨 세력이 퇴조했다.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좌평을 설치했으며 왕족을 상좌평에 임명함으로써 권력기반을 안정시켰다. 대외관계에서는 왜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중국의 동진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직지(直支) 또는 진지(眞支)라고도 한다. 『송서(宋書)』에는 여영(餘映)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신왕(阿莘王)의 맏아들이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으로서 해씨(解氏) 집안 출신이다. 전지왕(腆支王)의 사망 연대에 대해 『송서(宋書)』 백제전에는 424년 이후에, 『일본서기』에는 428년 이후에 죽은 것으로 나와 있어서 『삼국사기』에 쓰여 있는 420년과는 차이가 난다.
전지왕은 태자로 있을 때 부왕인 아신왕에 의해 397년(아신왕 6)에 왜(倭)에 볼모[質子]로 보내졌다. 이는 아신왕이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왜와의 화호(和好)를 도모하고, 보다 돈독한 외교관계를 맺고자 취한 조처였다.
전지왕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지배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다. 전지가 왜에 인질로 있을 때인 405년에 아신왕이 죽었다. 아신왕의 동생 훈해(訓解)가 섭정을 하면서 그의 환국(還國)을 기다렸는데, 막내동생 설례(碟禮)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태자 전지는 부왕의 부음을 듣고 왜에서 귀국하던 중 “국내 정세가 변했으므로 경솔하게 입국하지 말라”는 한성인(漢城人) 해충(解忠)의 간청을 받아들여 해도(海島)에 머물렀다.
전지왕 즉위 과정에서 백제 지배세력은 전지 옹립파와 설례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전지 옹립파는 훈해로 대표되는 일부 왕족과 전지가 귀국할 때 그를 호위하였던 100명의 왜군 및 해충으로 대표되는 세력을 들 수 있다. 반면, 설례의 지지세력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설례는 한성사람 해충과 그의 지지세력에 의해 진압되고 이어 전지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전지왕의 즉위는 해씨세력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전지왕 즉위 이후 해씨 가문이 크게 부상하였다. 한성인 해충은 전지왕의 옹립에 기여한 공로로 달솔(達率)의 관등에 조(租) 1천석을 지급받았으며, 해수(解須)는 내법좌평(內法佐平), 해구(解丘)는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각 임명되었다. 이로써 이전의 진씨(眞氏) 왕비족 시대는 퇴조를 걷게 되었다.
전지왕은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좌평(上佐平)을 설치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5세기 왕권의 대귀족 통제력이 흔들리는 시기에 실권을 장악한 해씨세력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상좌평을 설치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상좌평의 설치는 오히려 왕권중심의 정치체제 확립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제도적 장치란 특징이 있다. 또한 전지왕대의 상좌평에는 의붓동생인 여신(餘信) 등과 같이 국왕과 밀착된 인물이 임명되기 때문에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좌평을 설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신은 해씨세력과 더불어 전지왕의 옹립에 깊이 관여하였던 인물로 추측되므로, 전지가 왕권강화 정책을 펼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고 보여진다. 즉 전지왕이 왕족을 통해 여타의 세력들을 제어하면서 왕권강화 정책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해씨세력도 진씨세력의 퇴조라고 하는 정치구도 변화 속에서 그들의 권력기반을 안정시키고 왕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신의 상좌평 임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좌평은 왕권 중심의 정치세제를 확립시키기 위해 설치된 관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대외관계에서 전지왕은 동진(東晉)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해, 416년에 ‘진동장군 백제왕(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또 왜와의 우호 관계도 계속 유지했는데,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온 왜의 사자를 우대하고 왜에 비단〔白錦〕 1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