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상(金堤上)이라고도 한다.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하였다. 『삼국사기』에 박제상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이사금의 5대 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阿道) 갈문왕(葛文王),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으로 되어 있으나, 이러한 그의 세계(世系)는 거의 신빙성이 없다.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할 필요에 의해 402년(실성왕 1) 내물왕의 셋째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파견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왕은 즉위 후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군신을 불러 협의하였다. 그 결과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迺),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등 세 사람이 모두 박제상이 그러한 역할을 맡을 역량이 있는 적절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였다.
당시 박제상은 양산(梁山) 지방의 토호 세력으로서 삽량주간(歃良州干)이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는 418년(눌지왕 2) 왕명을 받들어 먼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해 복호를 구출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귀국한 즉시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부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떠났다.
그는 왜에 이르러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해 온 것처럼 속였다.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해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였다. 이에 왜가 병을 파견해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嚮導)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해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 왕 앞에 끌려갔다.
왜 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했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해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했으며,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