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민 중 가장 유력한 세력자에게 주어졌다. 7세기 초엽부터 점차 고구려·백제와의 항쟁이 치열해지자 지방민을 중심으로 하는 군단을 조직하면서 두게 된 듯하다.
군사와 관련된 중앙군단으로는 군사당(軍師幢)이 있고, 그 지휘관으로서 군사당주(軍師幢主)가 있었는데, 군사는 바로 이 군단과 관계있는 직책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의 관등은 외위(外位) 11계(階) 중 제2등인 술간(述干)과 제3등인 고간(高干)으로 촌주(村主)와 함께 가장 높은 관등을 소지하고 있다. 이 밖에 군사에서 분화한 ‘가군사(假軍師)’라는 직명도 있었다.
이 군사는 신라 말까지 계속하여 지방민의 직명으로 사용되었는데, 청주(菁州 :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의 <연지사종명 蓮池寺鐘銘>에 그 명칭이 보인다.
군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6, 7세기 신라의 지방통치를 행정과 군사의 이원적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보는 입장에서, 촌주가 지방민 유력자 중 행정을 담당한 직책이었던 반면, 군사는 직접 군단에 편성되어 전투행동에 일상적으로 참가하는 직책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양자 사이에는 기능상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며, 다만 전시에 군단이 편성될 때에 촌주가 군사라는 직책을 가진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촌주가 직접 지방민을 행정·군사적으로 지휘, 통솔하였으나 7세기에 점차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이 분화되면서 지방유력세력으로서의 촌주 중 군단조직으로 편성된 자가 군사라는 직명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