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봉보부인은 조선시대에 왕의 유모에게 내린 외명부 종1품의 작호(爵號)이다. 왕자나 왕녀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 가운데, 왕자가 왕이 되면 책봉되었다. 내외법 등으로 양반가에서 유모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 천민 출신이었다. 왕자가 3살이 될 즈음까지 궁중에서 생활하였다. 왕과 특별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어 물질적 혜택뿐 아니라 신분까지도 높여주었다. 남편과 자식, 친인척까지 면천해 주고 남편과 자식에게 높은 관직을 주기도 하였다. 남편의 지위와 관련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역할에 의해 봉작을 받는 여성으로 궁녀나 의녀보다 지위가 높았다.
정의
조선시대에 왕의 유모(乳母)에게 내린 외명부 종1품의 작호(爵號).
개설
변천
그러나 봉보부인 칭호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이다. 세종은 중국 제도를 참작해 아보(阿保)의 공을 중히 여겨 유모 이씨를 봉보부인이라 칭하고, 종2품의 품계를 주었다. 그러나 성종대 완성된 『경국대전』에서는 종1품으로 승급되었으며, 인조는 봉보부인이 죽자 2품의 예로써 장사지내 줄 것을 예조에 명하는 등 대우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봉보부인 제도는 “봉보부인 조종응(趙鍾應)을 4등에 서훈한다(『순종실록』 권3, 순종 2년 11월 12일)”는 기록으로 보아 대한제국시기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유모의 가장 큰 역할은 원자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옷을 갈아입히고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려 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모가 단순히 아기의 성장을 돕는 것만이 아니라 아기의 인성 형성과 건강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 때문에 유모는 젖이 잘 나와야 하고 건강이 좋아야 하며 성격이 온화해야 하는 등 선택 조건이 까다로웠고, 중간에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유모는 원자가 3살이 될 즈음까지 궁중에서 생활하다가 이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계속 궁중에서 궁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또 궁 밖에서 아이를 보살폈던 유모는 그 집의 노비로서 같이 살다가 자신이 키운 아이가 왕이 되면 같이 궁궐로 들어와 왕과 왕비 옆에서 그들의 시중을 들기도 했다. 왕과 유모는 특별한 정과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들은 봉보부인에게 물질적 혜택뿐 아니라 신분까지도 높여주었으며, 모든 행사시에도 예우하였다. 즉 봉보부인은 종 1품의 관직으로 녹봉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수시로 쌀, 노비, 토지, 옷, 콩, 땔감 등 생활에 필요한 여러 혜택을 제공하였다. 유모 뿐만 아니라 유모의 남편과 자식, 친인척까지도 면천해 주고, 남편과 자식에게 높은 관직을 주기도 했다. 봉보부인이 죽으면 많은 부의(賻儀)도 내렸다. 특히 궁 밖에서 성장하여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성종과 불우한 성장과정을 거친 연산군은 자신의 유모에게 특별대우를 해 주어 신하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 살아서 봉보부인에 책봉되었던 왕의 유모는 많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봉보부인등록(奉保夫人謄錄)』
- 「조선 전기 봉보부인의 역할과 지위」(한희숙, 『조선시대사학보』 43, 조선시대사학회, 2007)
- 「18·19세기 왕실유모의 범위와 위상: 『탁지정례(度支定例)』와 『예식통고(例式通考)』를 중심으로」(박미선, 『사총』73, 고려대 역사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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