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헌황귀비 ()

엄비 사진
엄비 사진
근대사
인물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후궁.
이칭
이칭
엄귀비, 엄황귀비, 엄비, 엄상궁, 엄귀인, 엄순빈, 엄순비, 경선궁마마, 엄선영(嚴善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54년(철종 5) 12월 26일
사망 연도
1911년 7월 20일
본관
영월
출생지
서울
내용 요약

순헌황귀비는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의 후궁이다. 엄귀비, 엄황귀비, 엄비, 엄상궁, 엄귀인, 엄순빈, 엄순비, 경선궁마마, 엄선영(嚴善英) 등 여러 별칭이 있다. 1854년(철종 5)에 태어나 1911년에 사망했다. 궁녀로 입궁하여 명성황후를 모시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된 이후 고종을 보필하였다. 특히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97년 영친왕 이은을 낳아 귀인에 책봉되었다가 황귀비에 책봉되었다.

정의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후궁.
개설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는 엄귀비, 엄황귀비, 엄비, 엄상궁, 엄귀인, 엄순빈, 엄순비, 경선궁마마, 엄선영(嚴善英) 등 여러 별칭이 있다. 고종의 후궁으로 황태자 영친왕을 낳았다. 본관은 영월이다.

생애

1854년 음력 11월 5일(양력 12월 26일)에 증찬정 엄진삼(嚴鎭三)의 둘째딸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최고 지위인 상궁(尙宮)이 되었기 때문에 ‘엄상궁’으로도 불렸다. 명성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고종의 주1을 입으니 황후의 질투로 1885년 궁 밖으로 쫓겨났다.

1895년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하자 바로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재 입궁하였다. 고종은 자신도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싸였고, 자신을 돌봐줄 여성으로 엄상궁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곧이어 고종은 왕비간택령을 내려 정화당 김씨(貞和堂 金氏)를 왕비로 결정하였지만 ‘춘생문(春生門) 사건’으로 새 왕비의 입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왕비 자리는 계속 비게 되었고, 엄상궁은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엄상궁은 1896년에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시킨, 이른바 아관파천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엄상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보필하며 43세에 아들을 잉태하였고,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대한제국의 선포와 때를 같이 하여 영친왕 이은(李垠)을 낳았다. 이로 인해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貴人)에 책봉되었고, 선영(善英)이란 이름도 받았다. 1900년에 순빈(淳嬪)에, 1901년에 순비(淳妃)에, 1903년에는 황귀비(皇貴妃)에 책봉되었다. 궁호를 경선(慶善)이라 하여 ‘경선궁 마마’로도 불렸다. 엄황귀비를 황후로 승격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나, 한편에서는 반대하는 의견도 많아 결국 황후에 책봉되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후궁이었지만 왕비가 없는 상황에서 왕비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황귀비라는 독특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엄황귀비는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영친왕이 유학의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가는 인간적인 시련을 겪으며,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7월 20일에 덕수궁 즉조당에서 58세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일본측이 내세운 사인은 장티푸스였으나 일본에 있는 14살의 영친왕이 고된 군사훈련을 받으며 주먹밥을 먹는 활동사진을 보다가 감정이 북받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활동사항

엄황귀비는 구한말의 시대적인 요구를 잘 파악하여 여성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私財)를 들여 1906년에 진명여학교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창설하고, 1907년에는 경영난에 부딪혀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와주었다. 이외에도 궁녀들도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도록 했고, 수시로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해 주었다. 또 종로의 걸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고, 불탄 종로상점 재건축 비용이 모자라자 건축비를 대 주었으며,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에 돈과 건물을 하사하였다. 또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의 모범 잠업장 건립에 기금을 하사하는 등 사회 활동과 자선사업을 많이 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순헌(純獻)이며, 궁호(宮號)는 망덕(望德), 원호(園號)는 영휘(永徽)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순비진봉황귀비의궤(淳妃進封皇貴妃儀軌)』
『순비책봉의궤(淳妃冊封儀軌)』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숙명100년사』(숙명여자대학교. 2006)
『한국 근대 여성운동사 연구』(박용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한희숙, 『아시아여성연구』 45(2),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2006)
「1903년 엄비(嚴妃) 황귀비(皇貴妃) 진봉(進封)과 『순비진봉황귀비의궤(淳妃進封皇貴妃儀軌)』」(김상태,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 2, 서울대 규장각, 2004)
주석
주1

신하가 임금에게서 특별한 은혜를 받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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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한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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