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회 이래로 각 문명권에서는 하천의 수위를 측량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였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물가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척도를 새겨서 수위의 변화를 측정하고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수칙(水則)’이었다. 세종대에 제작된 수표 역시 이와 같은 역사적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제작한 수표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수표의 역사적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은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는 서울 청계천 수표와 장충단 공원에 있는 수표교이다. 세종대왕기념관의 서울 청계천 수표는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장충당 공원의 수표교는 1973년 서울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수표의 구조는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1441년(세종 23) 8월에 마전교(馬前橋)의 서쪽 물 가운데에 넓적한 돌[薄石]을 놓고, 그 위를 깎아 받침돌[趺石] 두 개를 세운 다음 그 사이에 모난 나무 기둥을 끼워 넣었다”고 한다. 받침돌과 나무 기둥은 쇠갈고리[鐵鉤]로 묶어 고정시키고, 나무 기둥에 척(尺) · 촌(寸) · 분(分)의 수를 새겨 호조의 낭청(郎廳)으로 하여금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한편 한강변의 암석에도 동일한 형태의 수표를 세우고 나루터를 관리하는 도승(渡丞)으로 하여금 수위를 측정하여 호조에 보고토록 하였다. 청계천에 수표를 설치한 이후 마전교는 수표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상과 같은 『세종실록』의 기록을 참조할 때 세종대의 수표는 목재로 제작되었고 그 위에 척 · 촌 · 분의 수치를 새겼음을 알 수 있다. 목재가 수표의 재료로 채택된 이유는 제작이 간편하고 눈금을 새기기 쉽다는 제작상의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수표는 물속에 장기간 잠겨 있으면 썩기 때문에 영구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었다.
목재를 대용할만한 것으로는 금속재와 석재가 있는데, 금속재는 제작상의 난점과 함께 부식의 염려가 있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수표의 재료로서 석재가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수표교는 장통교(長通橋)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리의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척 · 촌의 수를 새겨서 강우량을 측정하게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에는 목재였던 기존의 수표가 석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수표는 높이 약 3m, 폭이 약 20㎝의 화강석으로 된 부정육면체 방추형의 돌기둥이다. 돌기둥의 양쪽 면에는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고, 뒷면의 3척 · 6척 · 9척 되는 눈금 위에는 ○표를 파서 수량을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촌 · 분까지 새겼던 세종대의 수표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수표를 이용한 관측 기록이 남아있다. 『풍운기(風雲紀)』 · 『기우제등록(祈雨祭謄錄)』 · 『천변초출등록(天變抄出謄錄)』이나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일성록(日省錄)』 등의 연대기류가 그것이다.
『풍운기』는 관상감의 관측일지 원부(原簿)이다. 즉 관측에 임한 당직관리가 자기 담당 시간에 관측한 모든 현상을 규정에 따라 기록한 것이다. 관측은 24시간 동안 3교대로 했고, 관측자는 관측 내용을 기록하고 서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일성록』 등의 연대기 기록은 『풍운기』를 원본으로 삼았다. 매일 승정원과 시강원 및 규장각 등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해서 집계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수표단자(水標單子)’는 바로 이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