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 조선책략(朝鮮策略)』의 전래를 계기로 서구 열강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개화정책을 추진하기로 방향을 정한 조선 정부는 그 실행을 총괄하는 기구로서, 1880년 12월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전선사와 더불어 사대사(事大司) · 교린사(交隣司) · 군무사(軍務司) · 변정사(邊政司) · 통상사(通商司) · 군물사(軍物司) · 기계사(機械司) · 선함사(船艦司) · 기연사(譏沿司) · 어학사(語學司) · 이용사(理用司) 등 총 12사(司)로 구성되었다. 그중 전선사는 군국기무와 외교 통상 문제를 총괄하는 부서로, 개화 · 자강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인재 선발을 담당하였다.
1880년 12월 20일(음)에 공포된 통리기무아문의 절목(節目)에 따르면, 전선사는 인재를 선발하여 각 사(司)에 등용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당시 개화 · 자강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참신한 인재 등용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고종은 인재 선발의 기준으로 ① 학행(學行)이 독실하고, ② 실무에 능하며, ③ 기예(技藝)에 정밀 · 민첩하고, ④ 현실 대처에 능숙하며, ⑤ 병기를 잘 만들고, ⑥ 산술(算術)에 능할 것 등의 여섯 항목을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천거된 인재 가운데 현실 대처 능력, 병기 제작 및 산술 능력 등을 보유한 자가 통리기무아문에 등용되었는데, 전선사는 이러한 인재들을 아문 내의 각 사로 배치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통리기무아문은 출범 당시 12사였는데, 개화정책의 추진이 막 시작된 상황에서 당장 관장할 업무가 없는 부서도 일부 있었다. 그래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1881년 11월에 조사시찰단의 조사(朝士) 출신 인사를 등용함과 더불어 조직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전체 12사 중 2~3개를 병합하여 총 7사로 조정하였다. 그 결과 전선사는 각국 언어와 문자를 번역하는 일을 맡았던 어학사를 포괄하게 되어, 당상관뿐만 아니라 실무 관료인 주사(主事)들도 어학사의 직을 겸관하게 되었다.
이후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자 통리기무아문이 폐지되면서 전선사도 일시 철폐되었다. 그러나 군란이 진압된 후, 1882년 11월에 통리기무아문이 복설되면서 외교 관련 사무를 관할하는 통리아문(統理衙門)과 내정 관련 업무를 맡은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으로 분리되었는데, 전선사는 이 가운데 통리내무아문에 소속되어 부활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인 12월 통리아문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통리내무아문은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칭되었는데, 통리군국사무아문 휘하에는 전선사를 비롯하여 장내사(掌內司) · 이용사 · 군무사 · 감공사(監工司) · 농상사(農商司) 등의 6사가 있었다.
이후 통리군국사무아문이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에 의정부로 병합되면서 전선사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하지만, 통리군국사무아문을 계승하여 설치된 내무부(內務府)의 소속 부서인 7사 중 직제사(職制司)의 관할 업무가 각 관직의 추천 및 상훈(賞勳) 등을 관할한다고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전선사의 업무 영역 또한 직제사로 계승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선사는 1880년대 개화정책 실시 초기에 그 실행을 맡았던 부서 가운데 하나로, 비록 그 존속 기간은 짧았지만 인재의 등용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기구였다. 특히 전통적인 방식인 과거 제도에서 탈피한 인재 선발은 이후 1894년 갑오개혁기에 실시된 ' 선거조례(選擧條例)'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