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리아문은 1882년 11월 17일, 외교 통상 전문가인 묄렌도르프가 고빙된 것을 계기로, 외교 통상 사무를 전담하기 위해 설치된 중앙 관청이다. 창설 당시 조영하가 판리, 김홍집이 협판, 묄렌도르프가 참의 등에 각각 임명되었다. 1882년 12월 4일에 통리아문은 담당 직무와 기능을 선명하게 표명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임오군란 이후 묄렌도르프 〔穆麟德;Mӧllendorf〕의 고빙(雇聘)을 계기로, 설치된 외교 통상 전담 관서이다. 조선 정부가 1882년(고종 19)에 미국 · 영국 · 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복잡한 외교 사무를 처리하고 해관(海關)을 설치 · 운영할 외교 통상 전문가의 초빙은 시급한 과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2년 10월 8일에 톈진에서 리훙장[李鴻章]의 주선으로 조영하(趙寧夏)와 묄렌도르프 간에 고용 계약이 체결되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 정부의 외교와 통상 사무에 대해 자문을 해주고 조선 정부는 매달 해관평은(海關平銀) 300냥을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외교와 통상을 전담하는 통리아문은 1882년 11월 17일에 묄렌도르프의 알현을 받은 직후 고종의 전교에 따라 설치되었다. 창설 당시 병조판서 조영하가 판리통리아문사무(辦理統理衙門事務)에, 경기감사 김홍집이 협판통리아문사무(協辦統理衙門事務)에, 묄렌도르프가 참의통리아문사무(叅議統理衙門事務)에 각각 임명되었다.
11월 29일에는 상중(喪中)인 민영익(閔泳翊)이 협판통리아문사무에 임명되었다. 1882년 12월 4일에 통리아문은 담당 직무와 기능을 선명하게 표명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책임자인 판리의 명칭도 독판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