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정책 ()

근대사
제도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
이칭
이칭
통상 수교 거부 정책, 통상 거부 정책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흥선대원군 집권기
내용 요약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이다.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는 정책을 말한다. 주로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의 대외정책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 또는 통상 거부 정책으로 고쳐서 표현하고 있다.

정의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
'쇄국'의 개념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을 말한다. 나라의 문호를 걸어 잠근다는 의미인 ‘쇄국’이라는 용어는 나가사키[長崎]의 난학자(蘭學者)이며 통사(通詞)인 시즈키 다다오[志筑忠雄]가 1801년에 만든 조어(造語)이다.

독일인 엥겔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商館)의 의사로 나가사키에 1690년 9월에서 1692년 8월까지 2년간 체류하였는데, 『일본지(日本誌)』 권말 부록 가운데 「지금 일본국에서 자국민의 출국과 외국인의 입국을 금하고, 또 세계 여러 나라와 교통을 금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치임을 논함」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시즈키 다다오는 이 논문을 초역하였는데, 논문 제목이 너무 번잡하여 이것을 ‘쇄국론’으로 축약하여 번역하였다.

이후 ‘쇄국’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서구 열강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1858년에 ‘개국’의 상대어로 정착하였으며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에는 주로 부정적 의미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왕국(朝鮮王國)』(菊池謙讓, 1896), 『조선개화사(朝鮮開化史)』(恒屋盛服, 1901) 등에서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대외정책을 쇄국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유입된 개념이 한국의 역사서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나 ‘통상 거부 정책’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내용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 서양의 이양선이 조선 연해에 자주 출몰하였다. 이들이 통상을 요구하면 해금정책에 따라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였으나, 조난된 선원 등에게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푼다는 ‘유원지의(柔遠之義)’ 원칙으로 처리하였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베이징이 함락되고 청나라 함풍제(咸豊帝)가 피난 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의 조야에서 위기감이 확산되었다. 영국 · 프랑스와 청나라의 강화를 중재한 러시아가 그 대가로 연해주를 획득하게 되면서 조선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위협을 막고자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교섭은 성사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국경 침범과 통상 요청이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마침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하였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여기에 천주교를 금지하여야 한다는 대신들과 유생들의 주장이 이어지자 대원군은 천주교와 자신의 무관함을 과시라도 하듯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대원군은 병인박해(병인사옥)를 계기로 발생한 병인양요를 물리쳤다. 그 후 “바다의 관문을 굳게 지킬 것이며, 외국배는 삼가 통과할 수 없다[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비석을 덕진돈대 앞에 세워서 폐관자수(閉關自守)의 의지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868년(고종 6)에 발생한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서양인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추겼으며, 1871년(고종 9)에는 1866년에 발생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은 “서양의 배에서 나는 연기와 먼지가 온 천하를 뒤덮어도, 동방국의 광채는 의연하게 영원토록 빛나누나[西舶烟塵天下晦 東方日月萬年明]”라는 시를 짓고,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즉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척화비를 경향 각지에 세워 서양을 배척하는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의의 및 평가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서양 열강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도 분명하였다. 신미양요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승리일 수 있으나 군사적으로는 참패한 전쟁이었다.

1866년(병인년)에 만든 척화비를 1871년(신미년)에 전국적으로 세운 것은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병인양요에서는 승리하여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으나 신미양요는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신미양요 이후 오경석 등의 개항가(開港家)가 출현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침략을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활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강경한 배외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세계 정세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어렵게 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강상규, 『조선정치사의 발견』(창비, 2013)
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책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논문

배관문, 「시즈키 다다오(志筑忠雄) 역, 『쇄국론(鎖國論)』」(『개념과 소통』 14, 한림과학원, 2014)
연갑수, 「대원군과 서양: 대원군은 쇄국론자였는가」(『역사비평』 50, 역사비평사, 2000)
성대경, 「대원군 정권 성격연구」(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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