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색복조(色服條)에 통일신라가 복식제도를 당나라의 제도로 개혁하여 그 의관이 중화(中華)의 것과 같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 때 우리 나라에도 법복이 제정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 등을 보더라도 신라의 왕과 왕비가 당나라 황제의 예복인 면복(冕服)이나 황후복인 적의(翟衣)를 착용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처음에는 신라의 복장제도를 그대로 습용하다가 요나라가 득세하면서 그들로부터 왕의 면복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 받은 면복은 구장면복(九章冕服)으로 고대중국에서 생겨난 한족(漢族)의 전형적인 예복이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황제는 십이장면복(十二章冕服)을 예복으로 착용하였던바, 고려에서 받은 면복은 구장면복으로 황제의 표지인 일(日)·월(月)·성신(星辰)의 장문(章紋)이 빠진 것이었다. 고려의 법복은 그뒤 몽고의 침입 앞에 굴함으로써 몽고의 유풍을 따랐다.
그러다가 제31대 공민왕 19년(1370) 5월 명나라 태조와 황후로부터 왕과 왕비의 예복인 면복과 적의를 받음으로써 다시 예전의 법복제도로 돌아갔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법복제는 명나라를 통한 사여관복제였다.
그러나 세종연간에는 법복의 사여가 없었는데 ≪세종실록≫ 28년(1446) 3월 갑오조에 세종비(世宗妃)의 대렴 때에 명복(命服)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문종실록≫ 즉위년 3월 정미조에 “사여된 면복 2건과 본국에서 만든 것 1건……” 운운하는 구절이 있어 법복이 국내에서도 만들어졌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왕세자의 법복은 ≪연려실기술≫ 별집(別集)에 지금까지 왕세자에게는 면복이 없었는데, 세종이 칠장면복(七章冕服)의 하사를 주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아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 32년(1450) 윤1월 임자조에 기록된 ‘청세자면복표(請世子冕服表)’에는 고려 때에 왕세자에게 면복이 사여되었다는 구절이 보여, 이 때에 이미 명나라로부터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에 따라 명나라 세자의 관복인 칠장면복을 받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왕과 왕비의 법복이 함께 사여되었듯이, 이때 왕세자와 세자빈의 법복도 동시에 사여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시대의 법복제도는 임진왜란 이후 청조(淸朝)가 세력을 잡게 되면서, 청나라로부터 그들의 예제(禮制)를 따르라는 압력을 받게 되면서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예제를 싫어한 조선은 1639년(인조 17) 6월 신해에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의거하여 새로운 법복제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숙종 때에 이르기까지 법복제도가 확정되지 못한 채 이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다가 1747년(영조 23)에 비로소 면복이 ≪상방정례 尙方定例≫의 면복도(冕服圖)에 일정한 제도로 정해지게 되었다. 1751년에는 왕비법복과 빈궁법복제도를 ≪속오례의보 續五禮儀補≫에 실어 비빈의 법복제도를 확정하였다.
영조 때에 확정된 법복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위에 오르면서 법복도 중국의 황제와 동격인 십이장면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세자의 법복도 구장면복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