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원복(不遠復)’ 태극기 (‘)

정치
물품
문화재
대한제국기에 의병장 고광순이 '불원복'을 새겨 제작한 태극기.
물품
재질
면직물
소장처
독립기념관
제작 시기
1905~1907년
국가등록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등록문화재(2008년 08월 12일 지정)
소재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230번지 독립기념관
내용 요약

‘불원복(不遠復)’ 태극기는 대한제국기에 의병장 고광순이 '불원복'을 새겨 제작한 태극기이다. 전라남도 구례 일대에서 국권 수호를 위해 의병을 일으킨 고광순이 사용하였다.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불원복'이라는 글자를 새겨 국권 회복을 다짐한 것으로,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한 귀중한 사료이다.

정의
대한제국기에 의병장 고광순이 '불원복'을 새겨 제작한 태극기.
연원

조선 말부터 대한제국기에 전라남도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이다.

의병장 고광순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각 읍에 격문을 발송하고,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에 추대되어 북진하던 중, 주1의 권고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1896년에는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때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라는 뜻을 담은 '불원복'을 태극기에 새겨 의병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고광순은 1907년 친척 및 윤영기(尹永淇) 등과 봉기하여 남원성을 공격하였고, 지리산을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연곡사 복멸작전에 의한 야습을 당하여 9월 부장 고제량(高濟亮)을 비롯한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형태와 제작 방식

세로 82㎝, 가로 128㎝ 크기의 면직물을 바탕으로 하여, 태극 문양과 괘는 천을 오려 덧댔다. 태극 문양의 양방은 홍색, 음방은 흑색이며 4괘도 흑색이다. 괘는 가로 상단에 이괘건괘를, 하단에는 곤괘감괘를 배치하였다. 상단 중앙에 홍색실로 한자 '불원복(不遠復)' 글씨를 수놓았다.

변천 및 현황

'불원복' 태극기는 1986년 고광순의 후손 고영준이 독립기념관에 관리를 위탁하였다. '불원복'은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라는 신념을 태극기에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제국기에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료 가치가 크다. 2008년 8월 12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대한의 상징) 태극기』(국립중앙박물관, 2008)

논문

홍영기, 「한말 고광순의 의병활동과 지리산근거지론」(『역사학연구』 47, 호남사학회, 2012)
목수현, 「망국과 국가 표상의 의미 변화: 태극기, 오얏꽃, 무궁화를 중심으로」(『한국문화』 5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1)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주석
주1

나라에 병란(兵亂)이 있을 때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에게 훈유(訓諭)를 알리던 임시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우리말샘

집필자
목수현(서울대학교 규장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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