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건(玄尙健)은 1875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이명은 현상건(玄相健)이다.
1903년 용암포사건(龍巖浦事件)을 계기로 러 · 일 양국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8월 광무황제( 고종)의 밀사로 러시아와 프랑스로 파견되어 전시국외중립(戰時局外中立)에 대한 유럽 각국의 승인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다. 1904년 1월 21일 다시 광무황제의 밀명으로 중국 지부로 밀행하여 한국의 국외 중립을 선언하여 영국 · 프랑스 ·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으로부터 중립화를 승인받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 1904년 2월 일제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 체결하자, 이용익(李容翊) · 이학균(李學均) 등과 함께 한일의정서 체결을 결사 반대하였다. 일제로부터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손탁(Sontag)의 집에 피신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 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왕산(旺山) 허위(許蔿)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상대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집을 독려하자 이에 호응하여 의병들에게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190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범진(李範晋)이 중심이 되고 러시아 연해주의 이상설(李相卨) · 전명운(田明雲), 만주의 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밀사 파견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이 자주독립 국가임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가 조직되자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임되어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선포하였으며, 11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기도 개성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민족의식 고취 등 반일 투쟁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