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완(申尙玩)은 1891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앙학림(中央學林)에서 수학하였다.
불교계 학교인 중앙학림의 학생 대표로 활동하면서 김법린 등과 함께 유심회(惟心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의식과 불교 대중화를 위해 진력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 만해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유심회 회원인 박민오(朴玟梧) 등을 소집하여 3 · 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지시받고, 불교계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 · 1운동 직후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유심회 회원인 김상헌(金祥憲)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투신하였으며, 안창호(安昌浩)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한편, 불교 승려들의 비밀결사인 승려의용군의 조직을 주도하였다.
1919년 8월경 귀국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강원도 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 특파원 이성춘(李成椿)으로부터 10월 3일을 기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을 축하하는 제2의 만세운동을 실행하라는 인쇄물을 받고, 9월 중순경 강원도 철원의 신환균(申桓均), 원주의 감리교회 목사 조윤여(趙潤如), 춘천의 유한익(劉漢翼) 등을 찾아가 제2 독립시위 계획을 준비하였다. 이어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강대려(姜大呂)를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 축하 시위 계획을 전달하고 10월 철원 지역을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역할을 하였다. 그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간 뒤 11월 14일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0년 2월 서울로 돌아와 함경남도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 승려 김태흡(金太洽) · 강청월(姜淸月)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 4월에는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乾鳳寺) 승려 정인목(鄭仁牧) 등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봄 이른바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정치범죄처벌령 등 위반으로 징역 5년 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5월 가출옥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