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섭(張奎燮)은 1884년 3월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서 장완식(張完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경감학교(敬監學校)를 졸업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황해도 연안에서 유생 이윤룡(李潤龍) · 윤철모(尹哲模) 등과 1906년 여름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에게 사람을 보내어 시국을 통탄하며 구국의 길을 의논하고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 후 교편을 잡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드는 등 시위에 앞장섰다.
3 · 1운동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적십자사가 재건되자 1919년 10월 장연군에서 대한적십자회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 이후에는 의용단(義勇團)으로 개편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을 받는 해서국민회(海西國民會)를 1919년 11월에 조직하여 오두현(吳斗鉉)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서무 업무를 맡았다. 의용단은 소단(小團), 분단(分團), 부단(部團)으로 조직하여 소단은 10명, 분단은 10개 소단, 부단은 10개 분단으로 조직하여 무장하고 일제 앞잡이, 밀정, 경찰 등을 처단하고, 독립신문과 임시 주비단(臨時籌備團) 단칙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의용단의 사령관이 되어 박치남(朴致南) · 곽규호(郭奎浩) · 손상대(孫常大) · 임종문(林宗文) 등이 면 단장, 김원려(金元麗)가 군참모장이 되어 활약하다가 1921년 3월에 체포되어 5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