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李貞浩)는 1913년 3월 경상북도 대구(大邱: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광둥성〔廣東省〕에 있는 중산대학(中山大學)을 졸업하였다.
1935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조직부장과 화남지부장(華南支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5월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통합되자 광복군 제1지대 지대장 김약산(金若山) 휘하의 조원에 편입되어 상위(上尉)로 복무하였고, 10월에는 제1지대 정훈조(政訓組)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 11월에 개최된 제35회 의정원 회의에서 김원봉(金元鳳) · 김상덕(金尙德) · 손두환(孫斗煥) 등과 함께 외교 대표 파견안을 제출하였다. 이 법안이 수정 통과되어 임시정부의 승인 및 독립운동의 원조를 위하여 외교 대표를 미국 · 영국 · 소련 등 연합국에 파견하여 상주하게 하는 법적인 뒷받침을 제정한 뒤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1943년 3월 30일 외무부 총무과장에 보임되었다가, 1944년 6월에는 외무부 정보과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임시정부에서는 1943년 4월부터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管制)를 실시함과 동시에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를 새로이 설치하고 선전 업무를 좀 더 강력히 집행하게 되었다. 선전위원은 15명이 선임었는데, 조소앙(趙素昻) · 신익희(申翼熙) · 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선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1월 20일에는 한국 청년의 덕 · 지 · 체를 함양하며 호애호조(互愛互助)의 정신을 발휘하여 고상한 혁명자의 인격을 단련, 국가와 민족에 공할 것을 종지(宗旨)로 내세우며 한국청년회가 발족할 때 학술부장에 취임하여 혁명 자질의 양성과 국가민족을 위한 독립정신 함양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944년 6월 1일 충칭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장에 임명되어 7월 27일까지 재임하면서 주중(駐中) 미국 대사관에 특파되어 일본군에 대한 염전사상(厭戰思想) 주입과 일본군 내의 한적사병(韓籍士兵) 초모를 위하여 한문전단(漢文傳單) 작성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에는 광복군 제3지대 북경지구(北京地區) 특파공작원으로 활동하여 일군에 소속된 한적사병의 탈출 공작 등을 수행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