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룡(李起龍)은 1885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여 1952년 사망하였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신석우(申錫雨) · 정대호(鄭大鎬) · 오의선(吳義善) 등과 함께 활약하였으며, 임시의정원 청원위원회 이사로서 위원장 고일청(高一淸)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9년 7월 1일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常議員)으로서 회장인 이희경(李喜儆), 부회장 김성겸(金聖謙), 이사 여운형(呂運亨) 등을 보좌하였다.
1921년 10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가 논의되자, “임시정부가 성립된 지 3년도 못 되는데 다시 국민의 여론을 물어 임시정부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은 야심가의 개인적인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를 단연코 반대하였으며, 김홍식(金弘植) 민충식(閔忠植)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여운형을 방문하여 격론 끝에 여운형을 구타하기도 하였다.
이후 1922년 7월에는 안창호(安昌浩) 등과 같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가입하였으나 분쟁이 계속되자 바로 탈퇴하였다. 8 · 15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서울 · 경기지구 위원장을 지냈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