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李秀英)은 평안남도 강동(江東)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3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三登面)의 천도교 삼등교구에서 교구장 백인덕(白仁德) · 백관범(白琯範) · 김성초(金成初) · 장봉주(張鳳柱) · 최붕익(崔鵬翼) · 문선창(文宣彰) 등과 비밀회의를 열어 강동에서도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수영은 시위대와 함께 시가 중앙인 홍문(弘門) 앞 거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선포식을 거행하고 즉시 헌병대와 면사무소로 가서 시위 투쟁을 전개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삼등면 동추리(東鄒里)에서 강동헌병분견소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급히 가던 조선인 헌병 보조원 2명을 무장 해제하기도 하였다.
3 · 1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오순근(吳淳根) · 주석환(朱錫煥) · 표영준(表永俊) · 명덕상(明德相)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일부 세력이 다른 운동 단체와 통합하여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하자 광복군사령부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0년 3월 임시정부에서 특파되어 국내로 들어온 김석황(金錫璜)을 여행렬(呂行烈)이 평양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만나 결사의용단(決死義勇團) 조직을 협의하였는데, 이때 강동군 지부장에 선출되어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냈으며, 무기 구입 활동도 전개하였다. 5월에는 의용단 본부인 기홀병원에서 지부장 및 간부회의를 열고 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년 6월에는 평양에서 홍석운(洪錫雲)‧여행렬‧김송혁(金松赫)‧주석환‧임승업(林承業)‧이기영(李起榮)‧김동선(金東宣) 등이 이전의 일부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독립의용단(獨立義勇團)을 조직하자, 독립의용단 강동지단장을 담당하였다. 8월에는 미국의원단의 국내 입국을 앞두고, 평남 지단의 김예진(金禮鎭) 외 20여 명과 함께 대한일신청년단(大韓日新靑年團) 결사대를 조직하였고, 장덕진(張德鎭)‧안경신(安敬信) 등과 연락하여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지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평안남도에서 주석환‧문창선‧서달선(徐達善)‧ 이근배(李根培)‧한문기(韓文基) 외 여러 동지와 함께 성천군(成川郡) 대곡면(大谷面) 주재소를 습격하고, 1921년 2월에는 성천군 삼흥면(三興面) 묘산(卯山)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 아오키〔靑木〕를 사살하고 교전하던 중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