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8월 『 동아일보』 회양지국 기자로 입사하였다가 이듬해 민족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5년 한국민족당 화남지부 중앙집행위원으로 이경산과 함께 선임되었다. 1938년 4월 15일 거행된 안창호(安昌浩) 추도회에서 조소앙 · 지청천(이청천) · 마초근 · 소홍균 등과 함께 추모 연설을 하였다.
1938년 안춘생(安椿生) · 나월환(羅月煥)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조직하였으며, 이후 한커우〔漢口〕 · 우창〔武昌〕 · 창사〔長沙〕 전투에 참가하였다. 1939년 중국 치장〔綦江〕에 거주할 당시에는 한국국민당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한 후에는 후방공작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 중국 성도의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 제18기생으로에 입학하여 1943년 통신병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4월 1일 한국광복군 제2지대 개편 당시 정훈조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0월 27일 안훈이 정훈조장으로 선임되었을 때는 조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4월 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통운과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 5월 8일부터 12일까지 충칭에서 개최한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상무위원 겸 선전부 주임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2월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회 선전부장에 선임되었으며 , 6월 1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 확대에 의해 선전부 편집위원회 편집위원으로 선임되어 8월 21일까지 활동하였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하던 중 1944년 상반기 안우생 · 조순제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에 도착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정훈조장으로 미국 정보처 두곡지대에서 훈련받았으며, 국내정진국 황해도 지방반장으로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광복 직후 한인 탈출 사병을 모집하기 위한 이범석의 독수리작전에서 신영묵과 함께 지명되어 제9전구(戰區)로 파견되었다. 1946년 광복군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1946년 12월 2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거행된 조선민족청년단 간부훈련생 입소식에서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다. 1948년 2월 23일 개최된 조선민족청년단 전국위원회에서 이사로 선임되었다.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후 1950년 4월 보병학교를 졸업하고 185부대 정훈국장에 취임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