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춘생(安椿生)은 1912년 8월 12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금산면(錦山) 냉정리(冷井里)에서 태어났다.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조카로, 1918년 가족과 함께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만주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해륜중학(海倫中學)을 졸업하였다.
1933년 ‘중국중앙군관학교 뤄양〔洛陽〕분교 제2총대 제4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인 일명 한인특별반에 90여 명과 함께 입교하였다. 1935년 1월 중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학생으로서 난징〔南京〕 성내 고안리(高安里)에서 거행된 특무대 발대식에서 제2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특무대는 1935년 2월 난징 성내 동관리 23호에 한인학생훈련소, 일명 특무대예비훈련소〔蒙藏訓練所〕를 설치하여 학생들에게 중국군관학교 입학에 필요한 예비교육을 하였다.
1936년 3월 특무대예비훈련소에 기록된 학생 안춘생의 인상은 “키 5척 5치, 신체 강건, 얼굴 둥근 형태, 코 크고 눈썹 짙고 치켜 오르다, 두 발 왼편으로 나눔”으로 되어 있다. 1936년 7월 11일 한국특무대독립군과 학생훈련소에 있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국민당청년당의 특무부장을 맡았다. 1936년 여름 중국중앙군관학교 제10기 보병과를 졸업하고, 중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1939년 10월에 중국군 육군 소령으로 군정부(軍政府) 감호대대(監護大隊)에서 복무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대 창설의 첫 단계로 1939년 8월 군사특파단을 조직하여 ‘화베이〔華北〕 진출의 예비공작’으로서 시안〔西安〕에 파견하였다. 1939년 10월 하순경 시안에 도착한 군사특파단의 초모 활동은 안춘생 등 중국군에 복무 중이던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확장되었다.
1940년 6월 안춘생 등은 산시〔山西〕 지역에 파견되어 염석산(閻錫山) 부대의 협조로 활동하였다. 군사특파단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된 후 1940년 12월 29일 공식 임무를 끝마치고 명의가 취소되었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및 제1지대에 배치되어 군 생활을 이어갔다.
1941년 초 안춘생은 제1지대의 간부가 되었는데, 지대장을 포함하여 9명으로 구성된 제1지대는 모두 군사특파단 출신이었다. 1942년 4월 1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 암살사건 수습과 조선의용대 편입을 계기로 제1, 2, 5지대를 통합하여 제2지대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안춘생은 제1구대장을 맡았다.
1945년 5월부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와 미국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함께 추진한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의 계획이 변경되고, 8월 11일 지청천(池靑天, 이청천)을 지휘관으로 하는 국내 정진군(挺進軍)이 제1지구(평안도 · 황해도 · 경기도), 제2지구(충청도 · 전라도), 제3지구(함경도 · 강원도 · 경상도) 등 3개 지구로 편성되면서 제1지구대장이 되었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제의 패망 당시 중국 본토 주둔 일본군은 약 128만 명이었고, 그중 한인 사병은 2만 8천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임시정부는 중국의 주요 도시에서 일본군 내 한인 장병을 접수하여 광복군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설치하였다. 안춘생은 난징 지대의 지대장으로 부지대장 지달수(池達洙), 참모 문응국(文應國) · 진춘호(陳春湖) · 김유철(金裕哲) · 신영묵(申榮黙) · 허영일(許永一) · 서파(徐波) 등과 함께 조국 광복에 이바지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