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숙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종군하여 대일 심리전을 펼쳤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1937년 중국 광둥성의 중산대학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였고,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집행위원 겸 훈련부 주임, 1944년 3월 조선민족혁명당 감찰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10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종군하여 대일 심리전 전개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김효숙(金孝淑)은 1915년 2월 11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오신면(吾新面) 구룡리(九龍里)에서 김붕준(金朋濬, 이명 김기원)과 노영재(盧英哉)의 1남 2녀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오빠는 김덕목(金德穆), 동생은 김정숙(金貞淑)이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아버지의 생각 덕분에 6살 무렵 단발머리를 하고 서당에 다녔는데, 당시 여자아이는 혼자였다.
중국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의 중학교인 민생(民生)중학에 다녔다. 고등학교는 아버지가 선택한 기독교 학교인 혜중(惠中)학교에 동생 김정숙과 함께 다녔는데, 교장에게 부탁하여 한 명분의 학비만 내고 공부하였다. 동생 김정숙과 함께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진학하여 1937년 7월 1일 졸업하였다. 1936년 1월 2일 중산대학 법학원에서 공부한 송면수(宋冕秀)와 혼인하였다.
김붕준이 중국으로 간 이후 1921년 김효숙과 가족들은 병보석으로 출감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를 상하이로 탈출시키기 위해 파견된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윤응념(尹應念)의 안내로 김마리아, 도인권(都寅權) 가족과 함께 중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1920년 12월 김정숙의 둘째 큰아버지 김긍준(金兢濬)이 군자금을 모금하러 온 네 명을 김정숙의 집에 머물게 하였는데, 얼마 후 그들 중 두 명이 진남포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용강군에 머문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용강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을 거쳐 인천에서 중국 위해위(威海衛)에 도착하였으며, 위해위에서 화륜선으로 1921년 6월 24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윤봉길 의거 다음 날인 1932년 4월 30일 오빠 김덕목 등 네 명이 체포되었고, 1932년 9월경 김효숙은 동생 김정숙과 함께 상하이에서 아버지 김붕준이 있는 광둥성〔廣東省〕으로 이동하였고, 1937년 7월 언니 김효숙과 함께 중산대학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7년 7월 난징〔南京〕 남기가(藍棋街)에서 한글 교사로 활동하였고, 1937년 10월 18일 송면수와 함께 후난성〔湖南省〕 장사(長沙)에 도착하여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39년 2월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참여하여 항일 연극과 강연, 합창,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일 사상을 고취하고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류저우를 떠나 쓰촨성〔四川省〕 기강(綦江)에 도착하여 머물렀는데, 남자 67명, 여자는 김효숙 등 40명 총 107명이었다. 기강현 정부에서는 한교등기잠행판법(韓僑登記暫行辦法)을 제정하여 한인(韓人)들에게 거주 신청서를 작성 제출하게 하였고, 등록증을 발급하였다.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은 대부분 상승가(上昇街) 진가공관(陳家公館)에 머물렀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청년들은 기강현의 산 위에 있는 관음암(觀音庵)에 거처하였다.
1940년 6월 17일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창립하여 집행위원 겸 훈련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10월 13일 마일신(馬一新) · 이해명(李海鳴)과 함께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에 선출되었는데, 다음 날인 10월 14일 비법 선거로 무효임이 선포되었다. 1944년 3월 15일 조선민족혁명당 감찰위원이 되었고, 1944년 10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종군하여 대일 심리전 활동을 하던 중 8 · 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