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2월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線靑年工作隊)에 참여하여 항일연극과 강연, 합창,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일 사상을 고취하고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류저우를 떠나 쓰촨성〔四川省〕 기강(綦江)에 도착하여 머물렀는데, 김석동을 포함하여 남자 67명, 여자 40명 등 총 107명이었다. 기강현 정부에서는 한교등기잠행판법(韓僑登記暫行辦法)을 제정하여 한인(韓人)들에게 거주 신청서를 작성 제출하게 하였고, 등록증을 발급하였다.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은 대부분 상승가(上昇街) 진가공관(陳家公館)에 머물렀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청년들은 기강현의 산 위에 있는 관음암(觀音庵)에 거처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충칭〔重慶〕에서 시안〔西安〕으로 이동한 총사령부의 인원을 중심으로 제2지대가 편성되었다. 김석동은 제2지대 본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3월 강홍주(姜弘周) · 남상규(南相奎) · 민영주(閔泳珠) · 민영숙(閔泳淑) · 윤신민(尹信民) · 이범석(李範錫) · 최용덕(崔用德) · 황애숙(黃愛淑)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신입 당원이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 9일 한국국민당 · 재건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되어 창당된 정당으로, 통합 과정부터 건군 문제를 검토하고 계획하여 광복군 편성을 한국독립당이 추진해 나갈 당면 목표의 하나로 결정하였다. 1943년 3월 김석동은 한국독립당의 5개 구(區) 중 15명으로 구성된 제4구에 속하였고 매주 월요일 19시에 주회(周回)를 하였다.
1943년 6월에는 김구(金九) 주석의 주선으로 인쇄 기술을 습득하여 『 독립신문』 중경판(重慶版) 발행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3년 6월 1일 자로 발간된 『독립신문』은 임시정부 선전부에서 발행하였는데, 한 · 중 연대와 대중국 선전 활동이 중시된 때문이었다. 제2호는 1944년 8월 15일, 제3호는 8월 29일, 제4호는 10월 15일, 제5호는 1945년 1월 10일, 제6호는 1945년 3월 1일 자로 발간되었고, 1945년 7월 20일 자인 제7호까지 발간되었다.
1945년 1월 9일 민영주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판공실 서기로 임명되었고, 1945년 5월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와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중국지부가 추진한 합작 훈련 즉,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에 참여하여 정보파괴반을 수료하였으며, 국내 정진군 본부 요원에 편성되어 국내 진입을 꾀하던 중 8 · 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