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대동단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1919년 3월 말경에 서울 전협(全協)의 집에 모여, 첫째 한국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해 독립국을 형성하게 할 것, 둘째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셋째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의 3대 강령을 제창하고, ‘조선민족대동단’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단원은 귀족·관리·유학자·종교인·상공인·청년·학생·부녀자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조직되었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군자금 등 재정은 전협이, 선전활동 및 대외활동은 최익환(崔益煥)이 맡았다. 그 밖에 김찬규(金燦奎)·박영효(朴泳孝)·민영달(閔泳達) 등이 참가하였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평안도·함경도·만주 등에 지부를 설치해 조직을 확대하였다. 1919년 4월부터 1년간 지하문서를 배포하고, 특히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하였다. 임시정부수립 이후에는 본부를 상해로 옮기려 했고, 의친왕 이강(李堈) 을 상해로 탈출시키려는 거사를 기도했으나 관련자가 붙잡혀 실패하였다.
의친왕 탈출 기도는 실패했지만 그 일을 통해 대동단이 국내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들은 1920년 6월 예심을 거쳐 12월 1심판결에서 전협과 최익환 등 31명이 징역 6개월에서 8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가진과 나창헌(羅昌憲) 등이 대동단의 활동을 계승해 정남용(鄭南容)이 붙잡히기 전까지 각종 선언서·기관방략(機關方略)·포고문 등을 등사해 전국에 배포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선전, 유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종욱(李鍾郁) 등을 파견해 대동단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12월에 독립대동단규칙서에는 모두 8장 45개조에 달하는 규칙과 세칙 44개조가 첨가되어 대기관의 조직 구성을 볼 수 있다.
단원 중 의병장 임병찬(林炳瓚)의 큰아들 응철(應喆), 넷째아들 수명(守明), 동생 병대(炳大) 등 일가가 대를 물려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주동자 전협 등은 한때 일진회원으로 친일파였으나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어 더욱 그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