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작전 (수리)

현대사
사건
2차대전 중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가 한인을 대일전에 활용하기 위해 광복군과 합작으로 정보요원을 양성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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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2차대전 중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가 한인을 대일전에 활용하기 위해 광복군과 합작으로 정보요원을 양성한 계획.
역사적 배경

1945년 2월 24일 중국 주재 OSS는 한인을 대일전에 활용하는 계획을 작성하였다. 이 계획안은 워싱턴의 OSS의 검토를 거친 뒤, 3월 13일에는 미군 중국전구사령부(Headquarters, US Forces, China Thearter)에 보고되어 실행단계에 이르렀다.

경과

임시정부 군무부는 연합군을 주도하는 미국과 연계하여 한국과 일본 본토에서 지하공작을 진행한 뒤 미국과 연합하여 한국으로 진입한다는 「한국광복군건군반작전계획(韓國光復軍建軍反作戰計劃)」을 수립하고 OSS와 교섭을 추진했다.

미국과의 교섭은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錫)이 미 제14항공군 사령관 셴놀트(Claire L. Chennault) 소장에게 광복군이 미국의 작전을 지원할 것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이범석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우선 한국인공작반을 설치하여 일본문서 번역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제3지대의 김학규(金學奎)도 독자적으로 셴놀트 소장 및 OSS 실무진과 접촉해 3월 15일 한미 군사합작에 관한 6개항의 원칙에 합의했다. 이 원칙은 미국이 광복군에 훈련과 장비를 제공하는 대가로 광복군은 대일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미국에 제공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였다.

김구 주석은 3월 16일 김학규와 OSS가 합의한 6개항 원칙을 승인하였다. 4월 3일에는 김구 주석과 OSS의 써전트(Clyde B. Sargent) 대위가 양국의 합작 문제를 최종적으로 합의하였고, 4월 17일에는 정식 협정이 체결되었다.

OSS의 훈련은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를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제2지대의 훈련소는 2지대 본부가 있던 두취(杜曲)에 설치되었으며, 제3지대의 훈련소는 리황(立煌)에 설치되었다. 5월 11일에는 써전트 대위가 독수리작전 책임자로 두취에, 버치(John M. Birch) 중위가 리황에 부임했다.

미국은 제2지대의 훈련을 위해 군수, 통신, 재정, 행정 장교를 포함해 40명의 기간요원을 파견했다. 2지대는 125명을 선발한 뒤 기수를 나누어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 과정은 정보수집을 위한 첩보교육에 중점이 두어졌으며, 매일 8시간씩 실시되었다.

1기생의 훈련은 8월 4일 완료되었으며, 38명이 교육과정을 통과했다. 8월 5일에는 2기로 훈련받을 인원이 두취에 도착해 8월 14일부터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중단되었다. 제3지대는 7월 초부터 리황에서 3개월 과정의 훈련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2지대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항복으로 중단되었다.

결과

국내 침투 작전은 8월 4일 제2지대의 1기생 38명이 훈련을 마친 시점부터 구체화 되었다. OSS는 8월 3일 평가단을 파견해 제2지대 1기 훈련 수료생을 대상으로 작전에 필요한 평가를 실시했다. 8월 7일에는 김구 주석과 지청천(池靑天) 광복군 사령관, 이범석 제2지대장과 OSS 책임자들이 회의를 가지고 공동작전 수행을 선언했다.

광복군은 OSS와 연계해 국내정진군 공작반을 편성했고, 침투 계획은 OSS의 훈련교관인 쿠퍼(Chester Cooper)에 의해 입안됐다. 그러나 침투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이 항복하여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하자 국내정진군을 8월 16일 출발시켜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국내정진군은 일본군의 저지를 받아 8월 19일 중국으로 귀환했다.

참고문헌

『重慶 大韓民國臨時政府史』(황묘희, 경인문화사, 2002)
집필자
윤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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