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에서 출생했다. 세례명은 요셉이다. 아버지는 김석지(金錫之)이며 어머니는 이내순(李迺順, 마리아)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26년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일리 출신의 이병일(李炳日, 마리아)과 혼인하여 2남 3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서울대교구의 김몽은(金蒙恩, 요한) 신부는 그의 장남이다.
1929년 평양의 광성고보(光成高普)를 수료하였으며, 1932년 성태면 마산본당의 교회학교인 사립 효성학교(曉星學校)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1937년 교직을 사임하고 가톨릭조선사에 입사하였다. 그는 『가톨릭조선』을 보급하고 확장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나 1938년 재정난으로 『가톨릭조선』이 폐간되자 평양교구의 전교사(傳敎師)로 임명되어 평안도의 각지를 돌면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3년 평안남도 정주(定州) 본당의 사립학교인 해성학교(海星學校) 교장으로 다시 교육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 본당의 전교사 겸 총회장이 되어 전교활동도 하였다. 이 무렵부터 민족주의자들과 관련을 맺고 도움을 주었다. 1944년 적성국가의 국민인 미국인 신부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이는 당시 평양에서 활동하던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신부들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정주군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조만식이 창당한 조선민주당 정주군 위원장을 하면서 공산당에 맞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신탁에 찬성하라는 소련 군정의 요구를 거절한 조만식이 소련군에게 연금되고, 조선민주당이 최용건에 의해 장악되자 주류파 당 간부들은 집단 월남하였고, 북한 당국이 김관택에게도 체포령을 내리자 1947년 북한을 탈출했다.
월남한 이후 가톨릭 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 한국 지배인으로 모든 실무를 관장하였다. 그는 도움을 청하는 많은 사람을 면담하고 구호가 필요한 곳을 현지 답사하면서 구제 사업의 진척 상황을 파악하였다. 1950년에는 가톨릭 구제회 한국 지부장인 캐롤 몬시뇰(George Carroll Monsignor)과 협의하여 오류동에 있는 나환우들을 위한 ‘성 라자로원’을 창설하였으며, 1951년에는 가톨릭 구제회 구호금으로 시흥군(현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87번지)에 대지를 구입하여 나환우들이 모여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캐롤 몬시뇰은 과거 김관택이 효성학교 교원으로 있을 때 마산 본당의 주임신부로 재임했기 때문에 그와 인연이 있었다.
1949년 11월 월남한 평양교구 신자들이 모여 ‘평양교구 신우회(平壤敎區 信友會)’를 조직하였는데, 김관택은 신우회의 5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12월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신우회관을 마련하고,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 후원사업과 성소계발 그리고 신우회 기금을 조성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60년 7월에는 서강대학교 후원회의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67년 1월 종로 본당의 초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에 교회 묘지를 마련하는 등 말년에는 교회의 활동에 많은 공을 쏟았다. 1974년에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