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화(李重華)는 1880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1월경부터 러시아 유격대 대장 메리코포스코의 통역이 되어 간도의 이동휘(李東輝)와 연락하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과 교류하였다. 1920년 12월 24일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임시정부 요원 김판이(金判伊)를 만나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로 협의한 뒤, 같은 달 29일 김판이와 함께 안동현을 출발하였다.
경성부(京城府)로 잠입한 후 1921년 5월 중순경까지 모의 폭탄을 제조하는 한편,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 증서 1,000원권, 500원권, 100원권 등 총 7,600원 상당의 증서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의 수령서 10매를 휴대하고 경상남도 밀양으로 향하였다.
밀양에 도착한 후 북면(北面) 사포리(沙浦里) 거주 박수엽(朴秀燁), 북면 대순리(大順里) 거주 박병목(朴炳穆)으로부터 각 2회, 북면 퇴로리(退老里) 거주 이병규(李炳圭)로부터 1회, 산외면(山外面) 금천동(琴川洞) 거주 손진원(孫振遠)으로부터 3회, 산외면 남기리(南沂里) 안종엽(安鍾燁)으로부터 1회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동지 손형로(孫亨魯)에게 북면 퇴로리 거주 이재형(李載亨)에게 군자금을 모집하게 하는 등 3,000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음력 7월경 김판이에게 전달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다.
그 뒤 대구와 밀양을 오가며 김판이의 귀환을 기다리던 중, 1921년 10월 21일 대구 대화정(大和町)에서 대구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1922년 2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강도 · 폭발물 벌칙 위반,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으로 징역 8년 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3월 3일 공소 취하로 옥고를 치렀다.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