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군인·의병. 평안남도 중화 출신. 독립군 여순근(呂淳根)의 아들이다.
1909년 YMCA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동지들과 같이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 상해임시정부와의 연락방법 및 국내활동에 대하여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다시 상해에 다녀온 뒤에 홍석운(洪錫雲)·이기영(李起榮)·김송혁(金松爀)·한준관(韓俊觀)·문빈(文斌)·이춘삼(李春三) 등과 더불어 항일구국단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였다. 같은해 11월 동지들로 하여금 만주에서 권총과 폭탄을 반입하도록 하는 등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하였으며, 이듬해인 1920년 3월 임시정부 특파원 김석황(金錫璜)과 협의하여 결사의용단을 조직하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여 군자금모금과 무기구입에 노력하였다.
같은 해 8월 만주에서 귀국한 동지들과 함께 평안남도 도청·평양경찰서 등 일제 관청을 일시에 폭파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표영준(表永俊)과 같이 평양부청에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이 불발하여 실패하였다.
계속하여 일본인 경찰을 사살하고, 평안남도 경찰부장의 차를 저격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가 중화경찰서에 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27년 출소하여 만주에서 아버지를 만난 다음 상해로 가던 중 중국 관헌에게 잡혀 일본영사관을 거쳐 국내로 압송되어 주거제한조처를 당하였다.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김구(金九)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