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범학교 7회생들을 중심으로 한 1939년 7월의 대관작업장 저항사건 이후, 이 학교 학생들은 일제에 대한 감정적·일시적 충돌이나 산발적인 저항보다는 반일민족의식의 조직화가 장래에 더욱 필요할 것으로 인식하였고, 이에 따라 결성된 조직이 다혁당이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표면상 문예활동을 표방하는 ‘문예부’와 학술연구를 표방하는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정기적인 회합을 가지고, 문예작품의 발표 및 감상, 여러 부문의 학술연구발표 등을 통해 민족의식·항일정신을 고취해 나갔다.
그러나 1941년에 들어와 문예부와 연구회의 학생들이 대거 졸업하게 되자, 문예부·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9회생 유흥수(柳興洙)·문홍의(文洪義)·이동우(李東雨)·이주호(李柱鎬)·박우준(朴祐寯)·권쾌복(權快福)·배학보(裵鶴甫) 등 16명이 2월 15일유흥수의 하숙집에서 집회를 열고 항일비밀결사인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목표는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하고, 조국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해 결사 투쟁하는 데 두었다. 교내의 항일운동에 그치지 않고 대외적으로 타교생 및 일반사회인사에까지 침투하기로 결의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하였고 당수(권쾌복)와 부당수(배학보) 밑에 총무·문예·연구·예술·운동 등의 부서를 두고 활동하였다.
실천규약으로, ① 당원은 비밀을 엄수할 것, ② 당원은 주 2회 회합하고, 간부는 주 1회 이상 회합할 것, ③ 각 부장은 책임을 지고 하급생을 지도 양성할 것, ④ 당원은 당수의 명에 절대 복종할 것, ⑤ 당원은 결당(結黨)한 자만에 한하고 신규가입을 인정하지 말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 단체를 결성한 학생들은 하숙집을 이용해 회합을 거듭하면서 운동상황을 보고하고, 각 부문의 확대 강화책을 협의하였다. 또,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 등을 토의하였다.
이들은 졸업 이후 전국 각지로 흩어져 교직생활을 하면서 끊임없는 인격도야와 학술연구로 조국광복의 원동력이 되며, 교직을 통해 학생들에게 장기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재학 때의 결의를 실천하였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비밀결사는 수업시간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설화를 가르친 졸업생이 1941년 7월 검거되면서 발각되었다.
이에 따른 대대적인 검거선풍 끝에 졸업생·재학생·교사·학부모 등 300여 명이 붙들렸다가 6개월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이 가운데 35명이 기소되어 예심에 회부되었고, 결국 34명이 대전지방법원에서 최고 8년, 최하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