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동 출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1919년 5월 만주로 건너가 안동현(安東縣)에서 오동진(吳東振)·김승만(金承萬)·여순근(呂淳根) 등과 같이 안동현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조직하고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와 광복군사령부로 개편, 발족됨에 따라 광복군사령부 모험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국내에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할 임무를 띠고 입국하였다.
입국 후 평안북도·평안남도·황해도 등 3도에 교통국을 설치하기 위해 평양을 중심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그런데 이해 9월 하순 행적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평양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그 뒤 강동군 삼등면 주기수(朱基洙) 집에 은거하면서 각지의 재산가들로부터 모은 자금으로, 1920년초 평양에서 여러 동지들과 같이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고, 각처에서 모은 군자금 17만원을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1920년 5월 동지들과 평남도청(平南道廳) 및 평양부청(平壤府廳), 각 경찰서 등을 폭파할 것과 각 주재소를 습격할 것을 결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9일 평양시내 세 곳에 폭탄을 던져 파괴하였다.
1921년 동지들과 성천군 삼흥면 묘산주재소를 습격하는가 하면, 대동군에서는 일본경찰의 수색대와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대동군 을미면에서 강동·평양·대동의 3개 경찰서 합동수색대와 교전하여 우에즈키[植月]순사에게 중상을 입히고 은신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 강동군 만달면 대성리에서 동지 46명과 함께 일본경찰 100여 명과 교전하다가 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1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31년 7월 다시 중국에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조국광복을 맞아 환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