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일명 김윤황(金潤璜)·김석황(金錫潢). 황해도 봉산 출생.
1919년 2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재학 당시 2·8독립운동에 가담해 회의참석 연락, 동지규합, 문서작성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훈방되자 곧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임명받고, 국내에 들어와 경향각지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다. 김구(金九) 등과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서무부장이 되었다.
7월 다시 상해로 돌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황해도대의원(黃海道代議員)에 선출되었다. 8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을 창간하기 위하여 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자신도 직접 600원(元)을 찬조하였다. 임시사료편찬위원으로서 『한일관계사료집』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1920년 9월 의용단장으로 동삼성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봉천(奉天)에서 일본경찰과 격전을 벌이다가 뒤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1920년 12월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경성(京城)감옥에서 복역하다 5년 2개월 만인 1925년 11월 가출옥하였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